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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Mar 06. 2024

그럼에도, 나의 소중한 사과나무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제작팀 곳곳에서 번 아웃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허겁지겁 원고를 쓰며 사무실 책상에서 김밥 한 줄 먹고, 생방송, 녹음 방송을 만든 후, 잔일을 마치면 어린 두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뛰어갔다. 어두워지기 전에 나를 데리러 오라는 딸과 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도보로 10분인 어린이집을 달리기라면 꼴찌만 하던 내가 5분 만에 달려가곤 했다.      


두 아이가 독감에 걸리기라도 하면 정말 좀비가 되는 것 같았다. 잠을 못 자 멍한 상태로 어떻게든 그날 방송은 만들기 위해 출근을 했다. 소수지만 아직 내가 만드는 방송을 들으면 힘이 난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정신없이 일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가고 있는데 주변이 고요했다. 그날따라 바로 옆 도로에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순간 고요한 적막에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알게 됐다. 번 아웃이 왔다는 것을.      


심각한 고민 끝에 육아휴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생각을 접었다. 당장 내가 육아휴직을 하면 담당 프로그램은 셧다운 될 지경이었다. 과장 같지만 정말 그랬다. 같은 팀의 팀원들은 이미 포화상태의 일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제작 PD들 사이에서 제작비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방송을 만들어야 하나, BGM 방송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노동력을 갈아서 어떻게든 방송을 만드니 오히려 힘든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조금씩 힘을 빼는 게 필요하기도 했다. 지속할 수 있는 경영을 위해서.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방송은 끝까지 잘 만들고 싶었다. 이유가 있었다.      


어느 주말, 내가 사는 동네에 철물점아이와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철물점에 폐지를 주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수레에 잔뜩 종이상자를 쌓아서 드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철물점 바닥에 온갖 잡동사니를 할아버지들이 때 묻은 장갑을 끼고 물건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붕 아래 매달린 라디오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또 하루는 택시를 탔다. 기사분이 2시가 되자 기다린 듯 주파수를 돌리고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진행자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기사분이 키득 따라 웃었다. 내가 이틀 전에 녹음한 방송이었다.     


나는 흙수저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흙에서 일하며 나를 키우셨다. 아버지는 힘든 일을 할 때면 트럭에 음악 소리를 최대로 키워놓고 밭 입구에 세워두시곤 하셨다. 어느 날은 아버지 방 한 면을 다 채우는 전축을 사셨다. 큰마음을 먹으신 것이다. 아버지가 전축을 틀면 우리 동네 입구부터 음악이 들렸다. 그럴 때 나는 그런 유희를 아는 아버지의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좋았다.      


나는 내가 만든 방송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청취자들에게서 우리 부모님을 느꼈다. 힘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작팀에서 서로 누구보다 누가 더 일하는지, 힘든 시간대를 하는지 투덜대는 말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쩨쩨하게 그런 걸 계산하며 일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제작 PD들도 정말 생방송 키를 잡으면 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청취자에게 힘을 주는 방송을 만들고 싶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사람처럼 나에게는 나의 방송이 예쁜 사과나무였다.     


소중한 내 사과나무...

그 사과나무를 보며 힘을 얻는 힘없는 사람들..  

    

우리 회사에서 다투는 방송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30년을 사과나무를 심고, 나무를 보며 청취자와 웃고 울었는데

세상을 정치 논리로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과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가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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