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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pr 12. 2024

잘가라, 푸르른 나의 청춘아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싱어게인3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했던 노래가 있다. ‘이젤’이란 가수가 부른 ‘푸르른 이 여름 지나’라는 노래였다.      


너는 나에게 여름을 속삭여주었고

눈부시게 빛나던 우리야


돌아갈 수 없을 나의 젊은 날     

푸르른 이 여름 지나 파란 가을 찾아오면은

코끝엔 시린 기억들이 안부를 물어온다     


노래를 부른 이젤의 목소리가 순수하게 들리면 들릴수록

가사가 더 쓸쓸하고도 아름답게 들렸다.     

 

정말 어이없게도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회사가 떠올랐다. 첫사랑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하필 삭막하게 회사라니. 그런데 더 정확히는 이 회사에서 보낸 나의 지난 11년이 떠올랐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아서 주제를 정하고, 코너를 짜고, 선곡하고, 회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과 웃었다. 내가 구상한 기획이 스튜디오에서 먹힌다는 느낌이 들 때, 뭔가 감동이라는 것이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행복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이제 11년이 됐다.      

생방송 스튜디오는 내가 처음 큐를 외쳤을 때의 설렘부터 직접 출연까지 하며 때로 좌절했던 모든 감정을 느낀 곳이었다. 매일 방송을 듣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줘야지 다짐하며 돌진했던 나의 모든 젊은 시간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회사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정말 회사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 왔다. 그런 상황에서 이 노래를 듣는데 그동안 내가 이곳에서 보낸 애쓰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맞다. 그 시간은 여름 같았다. 나의 청춘이었다. 이곳을 다니면서 남편을 만났고, 남편도 이 회사를 꽤 자주 오갔다. 장미꽃을 들고 오기도 하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회사 앞에 차를 대놓고 다투기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는 아이들도 자주 놀러 왔다. 이 회사에는 우리 가족의 시간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더라면 그 시간을 더 만끽했을 텐데…. 더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저질러 볼걸…. 제대로 뭘 해보지도 못했다는 부질없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참 열심히 하기도 했다는 생각도 든다. 적응하고, 인정받으려고 참 많이 애썼다는 생각이 든다.           


푸르른 이 여름 지나

우린 이렇게 또 이렇게 간다.      


이제는 회사의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고민하지도, 자책하지도 않기로 한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나를 망가뜨리지 않기로 다짐해본다. 이곳에서 보낸 나의 청춘은 불완전하면 불완전했던 대로 충분히 푸르렀다.


애썼다. 천꼬르륵. 과거에 있지 말고, 앞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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