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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을여행작가 로지 Aug 17. 2021

님과 함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어!"

이 가사는 어느 가수의 '님과 함께'란 노랫말이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통 학업에 열중하지 못했다. 이유는 집안 사정으로 그동안 연습해 왔던 가야금 연주를 더 이상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가야금을 배웠던 친구들은 매일 같이 학교가 끝나면 특수활동으로 열중하던 모습이 그토록 부러웠던 시절은 없었다. 학업을 소홀히 했던 핑계는 고스란히 가야금 탓으로 돌려졌고, 나는 학교가 끝나면 한 시간이 걸리는 집까지 혼자 걸어 다녔다. 


 어느 날 불같은 성향의 담임 선생님은 그날따라 무척이나 예민한 말투로 "앞으로 나와 장래희망을 발표해 보도록 해". 나는 당시 의기소침해 있었고 모든 것에 하고 싶은 의지가 없었다. 옆에 있던 짝꿍은 투덜대는 내 표정을 바라보더니 "야 그냥 너 잘하는 노래나 불러"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가 시킨 대로 앞으로 나가 율동을 하며 '님과 함께'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나의 춤과 노래가 끝나고 친구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은 가까이 다가와 느닷없이 출석부로 내 머리와 가슴을 툭툭 치며 "야 너 지금 장난해, 나를 놀리는 거니!" 수업시간에 장난을 친다며 귀까지 빨개진 선생님의 얼굴은 과히 괴물 같았다. 눈이 위로 찌어지고 금방이라도 머리에서 연기가 폴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일명 노처녀 히스테리였다. 평소에도 여자 학생들에게 출석부로 수치심을 자극시켰던 이상한 분이었다. 당시 나는 키도 작았고 매우 마른 체형이었는데, 출석부로 몇 대 맞은 나는 곧바로 쓸어지고 말았다. 


 이후 담임 선생님만 보면 주눅이 들었고 집에 가서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밝은 성향에 아이는 점점 더 내성적으로 되어갔고 학교 생활은 가히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무 가지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한동안 담임 선생님이 보기 싫어서 가정 시간만 되면 양호실 신세를 졌다. 언젠가 심리학 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은 트라우마는 절대 치유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상황을 모면하려는 마음에 괜찮은 척 겉으로 표현될 뿐이라고. 언제라도 비슷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증상은 다시 존재를 드러낸다는 말이었다. 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일이 생기면,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더듬고 얼굴이 발개지는 증상이 자주 나타나곤 한다. 심지어 가슴통증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역시 트라우마는 평생 치유되지 않는 숙제로 남았다.


 세월이 한 참 흐른 뒤, 내성적인 아이는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회사에 취직도 하고 다니고 싶었던 호텔에 취직도 하면서 어느새 트라우마는 잊혀갔다. 평소 결혼 생각이 전혀 없던 나는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해 열심히 여행을 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독신주의자란 탈을 벗어던지고 우연한 기회에 남편을 만나 지금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30대 중반을 넘어 늦은 나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갖지 못했다. 신은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는 걸 내려놓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삶에 늘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한 때는 욕망으로 달랜 적도 있었지만,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남편은 무한 긍정주의에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준다. 나는 비로소 남편의 온전한 사랑을 받으며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철이 없던 시절 무의식 속에 불렀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어!'의 노랫말 가사 말처럼, 현재 제주에서 풍경 좋은 언덕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그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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