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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May 04. 2024

아름다운 것을 누리고 창조하는 삶

한 끼 밥값이 1만 원을 넘는 시대다. 2024년 최저시급이 9,860원이니 밥다운 밥을 사 먹으려면 전문직이 아닌 서민은 최소 1시간 반을 일해야 한다. 맛없는 밥을 먹으면 화가 난다. 맛이 없다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음식점 주인의 성의가, 정성이 없다는 말이다. 그건 내가 하나의 인격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1만 5000원 정도의 돈, 돈을 벌어주는 도구로 취급받았다는 뜻이다. 내가 1시간 반을 회사에서 노닥거리며 때우든,  위험이나 갑질을 무릅쓰고 알바를 하든 그건 돈보다 귀한 내 삶의 시간과 교환한 돈이기 때문에 내 돈은 돈보다 귀한 돈이다. 그런 돈(= 결국 시간)을 주인의 무성의와 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음식은 사실 아름답지 않다. 특히 육류는 동물의 사체이므로 소고기의 특정 부위를 '선홍빛의 아름다운 자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웃프다.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있는 우리는 선홍빛의 피범벅 체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음식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손님이나 가족을 위해 고단함을 무릅쓰고 온갖 조리 과정을 겪어낸 주인장의 마음씨 때문이다. 결국 그 마음씨가 아름답고 그 마음씨에 감동하는 것이다. 정성을 다했는데도 맛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시행 착오를 거듭하면 결국 맛은 있어진다.


내가 원하는 삶이 과연 어떤 삶일까? 많은 고민을 거듭한 결과, 아름다운 것을 누리는 삶 - 이것이 내가 첫 번째로 지향하는 삶이다. 아름다운 것을 누린다는 것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려 해도 우리는 일단 빼곡한 아파트 단지와 차 소음이 있는 삶의 터전을 벗어나 이동해야 한다. 정성이 들어간 음식점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주변을 마음씨가 아름다운 사람들로 채우는 것 역시 그냥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귀한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정성이 들어간 맛난 음식, 마음이 아름다운 가족과 친구 이 모두가 귀한 존재다. 아름다움을 누리려면 우선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워야 하고, 무엇이 추한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위장이 약하고 민감하기 때문에 식품첨가물이 들어간 인스턴트 음식, 탄산음료, 과한 기름기를 함유한 음식을 판별하는 바로미터다. 내가 먹은 후에 고생하는 음식은 대체로 몸에 유익한 음식이 아니다. 내가 민감한 위장 덕에 무익한 음식을 거르듯 아름다움에 대한 변별력을 가진 사람은 추하거나 무익한 시간과 존재와 사람을 자기 삶에서 걸러낼 줄 안다.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움에 대한 변별력이 생겨 삶에서 추하거나 무익한 것들을 정리정돈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까이 둘 수 있다면 마치 깔끔하게 정돈된 방처럼 삶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내가 두 번째로 지향하는 삶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삶이다. 진정한 맛집을 찾아 만족스러운 음식을 먹는 것도 쉽지 않지만, 타인에게 대접할 훌륭한 음식을 창조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은 대체로 육수나 소스에 비밀이 있고 발효 과정도 중요하다. 그만큼 시간과 공이 든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통해 누군가가 진정 행복해한다면 음식을 만드는 데 쓴 시간과 노력, 노고는 보상이 된다.  내가 창조한 아름다움으로 누군가를 불행에서 건져내고 돈까지 벌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사람이 창조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글, 음악, 미술, 스포츠, 음식, 건축물 등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돈을 먼저 생각하면 아름다움이 추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 돈은 본질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상태에서 후에 따져봐야 할 가치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성경이 말하는 자기 형상은 겉모습이 아니다. 절대자가 우리처럼 생겼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신의 (마음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신과 같은 창조 본능이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음악과 글에 뛰어난 재능이 없는 내가 계속 만들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이런 본능 때문인 듯하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는 성경 말씀처럼 우리도 우리의 피조물을 보고 심히 기뻐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작품(창조물)이 필요하다. 그것이 글이든, 음식이든, 집이든. 내가 아름다움을 창조한 후 창조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누려줄 대상이 필요하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은 맛있게 먹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듯이.


이것이 삶의 큰 두 축이다. 아름다움을 누리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 결코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작업이다. 이 두 가지를 잘 해낸다면 결국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심지어 햇빛과 공기와 각도 같은 무형의 것들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 기여한다. 암흑만 존재한다면 뷰 맛집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공기가 없으면 아무리 고혹적인 음악도 전달할 수 없다. 사람의 외모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매력도가 다르다.


혼자 힘으로 완전한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아름다운 창조물도 완전한 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리는 아름다움은 창조의 밑거름이 되고, 창조한 아름다움은 누림과 연결된다. 누리기만 하거나 만들기만 하는 삶보다 누리며 만들고, 만들며 누리는 삶이 더 조화롭고 좋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최대한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누리다가 가는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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