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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un 08. 2024

왜 사냐고 묻지 말고 일단 살자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경기도 다낭시에 다녀왔다. 50이 넘도록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못 가봤다는 열등감에 은근히 시달리고 있었지만,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만큼 많은 정보를 알아봐야 하는 내 성격의 피곤함과 짧은 여행 후의 허무함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지레 지치고 질렸다고 할까. 그러나 호강을 못 시켜주는 남편으로서는 아내의 제안을 거절할 권리가 없었으므로 결국 까다로운 내가 숙소와 일정과 환전 등 모든 것에 총대를 메고 가이드가 되었다.


서민층인 내가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화 대저택(풀빌라)에서 3박을 하였지만 대저택이든, 바퀴벌레가 나오는 단칸방이든 3~4일이란 시간은 후딱 지나가기 마련이다. 한국에서 배달 라이더를 할 때, 식당 정문 출입을 라이더에게만 금하는 식당이 있다. 매장 안으로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식당도 있다. 헬멧을 비롯해 완전무장을 한 라이더의 복장이 손님에게 위화감을 조성해서일까? 이유야 어찌 됐던 동등한 인간이 아닌 하위 계급의 무언가로 취급받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베트남 상류층이나 한국인이 주로 묵는 이 풀빌라 리셉션에도 배달 라이더들은 들어올 수 없는 모양이다. 내가 숙소에서 배달을 시키고 리셉션으로 가지러 나가 보니 라이더들은 항상 그 뜨거운 땡볕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도 경제력에 따라 계급과 차별이 존재하는구나! 들어와서 에어컨 바람 잠시 쐬면 피로가 풀릴 텐데...'


아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용다리 불쇼'는 다리 꼭대기에 있는 파이프 같은(용의 입이라고 만들었겠지) 철 구조물 속에서 석유 등을 이용해 시꺼먼 구름과 함께 불을 뿜어대는 쇼였다. 내 눈에는 그저 환경을 오염시키는 유치한 불장난에 불과했지만, 그걸 보러 나온 어마어마한 베트남 인파와 오토바이 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리 통행은 마비되고,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몰려든 거지? 이게 그렇게 대단한 구경거리인가? 베트남 서민들은 유흥거리가 없나...


내게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오토바이 떼였다. 2인용 오토바이에 어린 자녀 둘을 더 태운 4인 가족 오토바이가 수도 없이 거리에 출현했다. 오빠 격인 아이는 제일 앞자리에서 앉지 못하고 발판에 선 채로 핸들을 잡고 가고 막내는 아빠와 엄마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서 간다. 신호등 있는 횡단보도도 찾기 어렵고, 아무 데서나 U턴은 기본이다.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대혼란 속에서도 사고가 나지 않고 각자 제 갈 길을 간다. 다만 우리는 목숨줄을 내놓고 길을 건너야 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장면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 호화 대저택, 베트남 음식, 유명 관광지보다 그들의 생명력. 그 생명력은 내가 아침마다 다니는 산책로에 제초기로 깔끔하게 정리한 그 자리에 불과 2~3일 만에 다시 왕성하게 피어나는 잡초들을 연상케 했다. 그 풀들은 '왜 사냐'고 '왜 살아야 하냐'고 물을 시간이 없었다. 닥치고 일단 다시 피어나고 살아나는 것이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땡볕에 무슨 일들로 그리 분주한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 행렬들은 쉽게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는 나의 정신을 망치로 때려 주었다. 그들은 주어진 삶을 불평하지 않았다. 불평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청년들은 식당이든 카페든 부지런히 일을 했고 친절했으며, 한시장 상인들은 폭염과 폭인(暴人) 속에서도 꿋꿋하게 물건을 꺼내고 흥정을 하며 장사를 이어갔다. 그 와중에 나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짜가 나이키 반바지를 하나 사면서 1~2만 동 가격을 깎는 게 재미있었다. 우연히 보게 된 결혼식 연회장도 야외에 대형 천막을 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축하를 해 주는지 인원이 엄청났고, 오랫동안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고 있었다. 내가 베트남에서 서민으로 태어났더라면 나도 아마 바퀴벌레가 나오는 허름하고 무더운 주택에 잘 적응해 살면서 한없이 무질서해 보이는 오토바이 떼 속에서 한 대의 오토바이를 몰고 있었으리라.


목적지까지 걸어서 이동하던 중 우연히 골목길로 들어선 적이 있었다. 골목길 안쪽 집에서 갑자기 두 꼬마 아가씨가 튀어나오더니 신나게 춤을 추면서 낯선 한국인 아저씨를 반겨주었다. 거리낌 없이 나를 잡고 자기들끼리 뭐라고 쫑알댔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행여나 아동 추행으로 고소당할까 두려워 내가 먼저 움찔 피했을 것이다.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아무런 의도와 계산이 없이 순수하게 환대 받는 느낌이었다. 걸어보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베트남의 주택가과 천진난만한 베트남 아이들을 만난 것이 너무 행복했다. 마침 지갑에 2000동(한화 100원) 짜리 소액 지폐가 있어서 하나씩 쥐여줬더니 돈에 뽀뽀를 하고 난리다. 이렇게 적은 돈에 저렇게 행복해하다니... 그 꼬마 아가씨들과 사진을 한 장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호이안 소원배 역시 아내의 소원에 따라 이동한 코스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파와 더위 때문에 고대 도시라는 호이안은 거의 구경을 못하고 소원배만 타고 왔다. 호이안 올드타운 거리에는 마사지 가게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꽤 많았다. 다리 입구에 인상이 밝고 건강해 보이는 아가씨가 마사지를 받고 가라며 말을 걸었다. 우리 가족은 다낭에서 이미 마사지를 받은 터라 가격을 비교해 보고 싶어서 나도 응하며 말을 몇 마디 주고받았다. 소원배를 타기에는 아직 해가 있어서 안방해변에 잠시 들렀다가 그 거리에 다시 왔다. 우리가 다리를 건너려고 하니 그 아가씨가 또 말을 걸며 아는 체를 한다. "오빠! 어디 가?" ㅋㅋㅋㅋㅋ 한국말을 꽤 잘한다. "소원배 티켓 사러 가!" 나도 신나서 큰소리로 대꾸한다. "거기나 여기나 똑같아. 가격도 같고, 배도 같아. 다리 건널 필요 없어." 소중한 현장 정보를, 그것도 한국말로 알려준다. 터질 것 같은 인파를 뚫고 다리를 안 건너도 되었다. 비록 삐끼를 하고 있지만 건강하고 삶의 에너지가 넘치고 한국말도 잘하는 그 아가씨 덕에 바로 앞에서 티켓을 끊고 배를 탈 수 있었다.


오토바이떼, 골목길의 꼬마 숙녀들, 건강하고 밝은 표정의 호객꾼 아가씨... 이 장면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명력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의미를 묻고 따지기 전에 삶은 이미 존재한다는 느낌. 존재는 의미 이전이다. 존재는 의미를 압도한다. 의미를 능가한다.


어렵게 검색해서 찾아간 베트남 펍에서 큰아들은 기분이 좋은지 평소에 공개하지 않던 여친의 사진을 공개한다. 십 년 넘게 부부가 아닌 가족으로 지낸 아내는 무알콜 칵테일에 기분이 업 됐는지 아들들과 처형과 조카 앞에서 갑자기 나에게 기습 정면 뽀뽀를 한다. 엉뚱하고 귀여운 내 짝꿍. ㅎㅎ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명곡을 만드는 것? 명작 소설을 남기는 것?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큰아들 결혼식에 자리를 지켜줄 아버지로서, 귀여운 마누라 여행 동반자로서 필요하니까 산다. 이런 의미도 좋다. 내가 뭐 대단한가? 그냥 우주의 먼지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존재다. 2인용 오토바이 앞자리 발판에 서있던 그 사내아이와 나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다. 골목길 꼬마 아가씨들과 호객꾼 아가씨와도 역시 동등하다.


삶이 힘들 때마다 그 장엄한 오토바이 떼와 상냥하고 강인한 베트남 사람들을 생각하려 한다. 가족 첫 해외여행을 계획한 아내, 여행 내내 든든하게 츤드레로서 가족을 챙긴 큰아들, 새벽 술자리에서 두 시간 동안 자기 성격이 얼마나 아빠와 같은지를 설명하며, 엉뚱하고 독특한 자신에 대해 뭔가 안도감을 느끼는 듯한 막내, 가족과 다름없는 처형과 조카까지... 나는 이 생명들에 끼여서 살아가고 있는 한 포기 풀인지 모르겠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이 섭섭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지만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삶은 어메이징이다. 나는 일부러 흥정을 하여 그랩 오토바이 뒷자리에도 타봤다. 그 오토바이 떼에 동참해 본 것이다. 내 육체의 에너지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녹초가 되었지만, 다시 푸르른 풀이 될 것이다.


생명을 발산하는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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