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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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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Jun 14. 2023

퇴사를 결심하다

: (feat. am.8:50 업무용 컴퓨터)

  



퇴사는 햇수로 8년 된 컴퓨터에서 시작 되었다.





  입사한 다음 해 손수 품의서와 지결서를 올려 산 컴퓨터였다. 나와 역사를 함께한 PC. 오래 사용 했기 때문에 PC 용량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쓰는데 무리는 없었고 나름 속도도 빨라 못해도 3년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일주일 전, 지인들과 카톡을 하며 월루를 살짝쿵 하던 중 컴퓨터가 '뚝!'하고 전원이 나갔다. 전원을 잘못 발로 찼나? 싶었다. 이상한 일이네하고 컴퓨터를 다시 켜면서 지인들에게 <우리 기(氣)가 매우 쎈가보다. 카톡하는 중에 PC가 나갔닼ㅋㅋㅋㅋ>라고 카톡을 보냈다.  처음 있는 증상이었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했다. 컴퓨터도 다시 켜 놓고 보니 계속 전원이 돌아갔기에 정말 발로 잘못 전원을 찼거나 아니면 지인들의 강력한 기(氣)에 PC가 눌렸거나 혹은, 그 둘 다였겠거니 했다.                                   

                                                               



  그리고 정확히 3시간 뒤, 문서 작업을 한창 하던 중 PC가 한 번 더 나갔다. '얘 왜이래?'이러면서 애써 작성한 문서 걱정에 다시 빠르게 파워버튼을 눌렀다. 윈도우 화면이 떴다. 그리고 정확히 10초도 되지 않아 다시 컴퓨터가 꺼졌다.  3번 정도 켰다 다시 꺼졌다를 반복했을 때 나는 울컥했던 짜증은 온대간대 없어지고, 패닉에 빠졌다. 다행히(?) 퇴근이 5분 정도 남았던터라 '그래. 얘(컴퓨터)도 좀 쉬고 싶은 날이 있나보지. 내일이면 괜찮을거야.'라고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컴퓨터야 우리 내일은 우리 열심히 일해보자라고 말한 뒤 퇴근을 준비했다. 기계란 자고로 말을 듣지 않을 땐 때리면 괜찮아지거나 혹은 시간이 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지기도 하니깐. 비폭력을 지향하고 평화주의자인 나는 PC에게 시간을 주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내일은 분명 괜찮겠지하고 약간은 찝찝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하지만,

PC는

그 다음 날에도

파워가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태생이 월루인 그 잡채지만 컴퓨터가 없다고 마냥 놀 수는 없었다. 약소한 일 하나 하더라도 컴퓨터가 필요하기에 사설업체가 아닌 '공식a/s센터'에 PC수리를 요청하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 노트북을 들고 왔다.         


(여기서 읭?하는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안다.

회사 컴퓨터가 망가졌는데 집에 돌아가 개인노트북을 들고 왔다고?

읭????????...

그런데 일단 넘어가자. 환장 포인트는 여기가 아니다.)


  금요일에 '공식 a/s 센터'로 보내고 업체로부터 컴퓨터 증상에 대해 연락 받은건 그 다음주 화요일 오후.


(즐거운 사실은 그때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회사에서 나는 내 노트북을 쓰고 있는 중이다.

다행이도 이것 역시 환장 포인트가 아니다.)  

          

<PC는 노후화로 인해 하드가 나갔으며, 안에 들어 있는 자료는 모두 하늘나라 8:45가 되었고, 하드교체 및 자잘한 수리비는 부가세 별도 33만원>이라는 청천벽력까지는 아니지만 마이헤드 빙빙이 될 만한 소식을 전해들었다. 수리비와 모조리 날아간 자료들이 아찔 했지만 뭐 다행이도 수리비로 쓸만한 예산은 있고 정말 중요한 자료들은 회사 외장하드에 있었으니 됐다, 이왕 이렇게 된거 수리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업무하자 했다.


상사에게 카톡을 보냈다. '컴퓨터 하드가 나갔다고 합니다. 수리비가 부가세별도 33만원이라고 하네요. 수리 할까요?' 비록 마지막 문장을 '~할까요?'라는 청유형으로 보냈지만 이건 '내 컴퓨터 망가짐. 부가세 제외 33만원 내고 수리하겠음.'의 청유형의 형식을 띈 보고 문자였다.                                                              

 

그런데,

상사가 말했다.


- 33만원 비싸. 네고해보렴.

- 네? 사설이 아니라 공식 a/s 업체인데요?

- 33만원 다 내고 수리 받는건 호구 아닌가?


네????????????????????



* 혹시라도 공식 a/s에서 수리비 네고해보신 분 있으시면 댓글로 경험담 공유 부탁드립니다.

공식업체에서도 네고가 가능한건가요? 제가 식견이 좁아 모르는것 같아 문의드립니다. (__)



 어이가 아리마셍이 되어 33만원 다 내고 수리 받는건 호구 아닌가 라는 문자에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니 저기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대답이 없으니 카톡이 하나 더 왔다. 29만원짜리 제품 소개 텍스트였다. 달랑 그거 하나 왔다. 한 글자 한 글자 키보드를 칠 때마다 분노가 치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단전에서부터 사회인의 기운을 어거지로 끌어 올려 다시 한 번 답장을 했다.                                         

                                                   

    

<제품 링크로 보내주시면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링크를 확인해본 바, 상사가 보낸 29만원짜리는 리퍼 제품이였다. 그것도 16년도 제품을 리퍼한 본체였다.


..

그 제품을 보고 난 햇수로 8년 다닌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사건만 놓고 보면 별일이 아니다. 플랫하게 나열하면 '컴퓨터 망가짐 - 예산이 33만원 밖에 없음 - 예산에 따라 PC 구매해야 함' 이게 전부이다. 하지만  8년 동안 다니면서 내내 이건 아니지 않나하는 일들이 29만원 리퍼 제품을 보자마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고 내가 여기 더 있으면 나중에는 컴퓨터가 망가졌을 때 10만원도 안되는 리퍼 제품을 구매해서 일해야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8년된 컴퓨터가 한번에 꺼졌던 것 처럼, 내 머릿속 퓨즈도 한번에 툭, 나가버렸다.                

내 생각이 큰 비약이라는건 알지만, 퇴사란 원래 이렇게 시작되는 것 아닌가?        

                                                                  




  달력을 보았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이 시국에 퇴사라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했지만, 그와중에 추석상여는 받고 나가야는게 좋겠다는 꽤나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10월 10일을 퇴사 일자로 잡았다. 아직 옆자리 동료 빼고는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7월 중 상사에게 퇴사를 이야기 할 예정이다. 퇴사에 대한 마음이 바뀔까? 글쎄, 33만원 짜리 PC를 사야하는 내 모습이 지금은 불쌍해 보여 바뀌지는 않을 것 같은데. 누가 그러더라. 내가 회사에서 불쌍해 보일 때 퇴사를 하게 된다고. 그렇게 다 백수가 되는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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