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급이 더 이상 통장에 찍히지 않으면 어른의 존엄성을 없다 그러나,
작년 8월 말 6개월의 휴직을 받았다. 무작정 퇴사보다는 한 보 뒤로 물러나 보자라는 마음이었다. 6개월 정도 무직 코스프레 상태로 있다보면 다시 회사를 다니고 싶을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퇴사보다는 휴직이 낫지! 그래 휴직을 하자라는 마음이었다.
(6월부터 8월까지, 휴직을 얻어 내는 일은 다산다난하기만 했다. 그때 썼던 일기장을 얼마 전 보았는데 절반도 읽지 못하고 봉인해 두었다. 정말 지리멸렬 그 자체였다.)
휴직 매직은 대단했다. 회사를 안 가고 2주가 지났을 무렵에는 내 안에 있는 ‘노비 DNA’가 다시 활발히 살아나 이 정도면 다시 회사를 나가도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었고, 회사를 안 간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는 우울증이 싹 나아 병원에 가지도 약을 먹지도 않게 되었다. 그 후 세 달 네 달이 지나면서 나는 이정도면 충분히 회사를 다시 다닐 수 있겠다 싶었다. 작년 12월에는 회사에서 사용할 달력과 업무수첩을 ‘내돈내산’하기도 했었다. 회사에서 쓸 물건을 내 돈 주고 사다니, 이처럼 확실한 시그널은 없었다. 나는 내가 회사에 다시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에 확신을 했다.
휴직 기간 동안 원 없이 집에서 뒹굴거리고,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에너지는 남아돌았고 그 에너지가 회사 복귀 버튼을 눌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회사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급휴직이었던 상태였기에 수입 ‘0인 상황’에서 나는 남편의 월급에 무임승차를 하고 있었다. 휴직하고 처음 맞은 25일, 이제는 더 이상 너와 나의 월급날이 아닌 당신만의 월급날이 되었을 때 남편이 눈치 준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의 출근길과 퇴근길을 배웅하고 맞이했다. 아주 매우 정중하고 낮은 자세로.
남편과 첫 싸움은 휴직하고 3개월 뒤 10월 25일에 발발하였다. 부끄럽지만 나의 씀씀이 문제였다. 수입은 줄었는데 나의 카드값은 크게 줄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카드 내역을 보면 이건 당신하고 쓴 거, 저거는 내가 잠깐 뜨개실 사러 갔다가 커피 마신 거, 그거는 뜨개실을 사러 갔으니 실을 좀 산거, 그리고 요고는 평일 낮에 도서관 갔다가 구내식당에서 밥 먹은 거..... 고렇고 저렇고 요론거야라고 남편에게 설명하는 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정말 큰 금액이어 봤자 만원을 살짝 넘는 금액들이었고, 대부분 팔천원 육천원 언저리의 금액들이었다. 짜잘짜잘하고 애기 콧속 코딱지 같은 금액들을 어디에다 쓴 건지 남편에게 설명하고 있자니 어른의 존엄성은 역시나 월급에서 나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고 쪼막쪼막하고 짜잘짜잘한 금액들이 모여 큰돈이 되었는걸.
그 후 우리는 25일이 되면 예민해졌고 대략 지난달까지 N번의 싸움을 했다. 황의정승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한 그의 말도 옮았고 나의 말도 옳았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나의 수입 문제가 컸다. 나는 그와 싸울 때마다 ‘그래, 2달 뒤엔 복직 할거니깐. 그러면 된다. 더럽고 치사해서 복직한다.’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복직을 한 달 여 앞둔 어느 날, 도파민이 파라팡팡 터진다는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를 보다가 나는 내가 복직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여자 주인공의 상사가 스템플러를 비스듬히 찍지 않았다고 버럭 하는 장면에서 숨이 턱하고 막히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주인공의 내레이션, ‘사람이 무능하면 자기가 아는 작은 것에 집중하고 큰 소리 친다.’ 그건 나를 힘들게 했던 (전) 직장 상사의 N가지 모습 중 한 가지 모습이었다.
그렇게 복직 한달 남겨 둔 1월의 어느날, 복직하면 월급은 받겠지만 약값이 더 들겠다는 확신이 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사를 했다. 더 이상 월급 통장에 돈이 찍히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퇴사 시그널은 강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