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Dec 13. 2023

선배다웠던 선배

퇴근 시간이 겹쳐 도로에 차가 많았는데 그 위로 올려다 본 하늘은 얼이 빠질 정도로 이뻤다. Paul 제공

날이 유난히 추웠던 겨울 어느날 선배를 다시 만났다. 여름 이후 다시 얼굴을 마주한 것이니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회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난 게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아마 이날 함께 자리를 했던 선배들과 동기 역시 그랬을 것이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임을 잘 알기에 우리는 그저 주어진 그 시간을 잘 보내기로 다짐한 바 있다.


선배는 예약했던 식당에 약속시간을 딱 맞춰 오셨다. 시간을 칼처럼 지키려는 기자의 습성이 엿보였다.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라던 선배는 얼마 동안 선택을 하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해 주문을 하셨다. 그렇게 부산스러운 만남의 시작을 뒤로한 뒤 우린 준비했던 선물을 전달했다. 뭘 이런 걸 준비했냐던 선배의 얼굴에선 만감이 교차하는 웃음이 띄었다.


이후 음식이 나왔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과거였다. 우리가 어떻게 모였고 어떤 일들을 했었는지 등이었다. 급기야 면접을 볼 당시 상황도 언급됐었는데 선배 말을 빌리자면 그때 내 모습은 이 회사를 꼭 오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단다. 선배가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약 2년 전 나는 우여곡절 끝에 얻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을 하고 싶었기에 시험 과정을 꽤나 절박하게 매달렸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배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법조 출입만이 아니라 여태껏 취재를 하면서 검찰, 경찰, 교수 등 취재원에게 참 불친절했던 것 같다고. 빨리 기사를 써야하니 취재원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번호를 얻었는지 등 설명은 생략하고 무조건 원하는 답을 얻기 바빴었다고. 일련의 일들로 반대 상황이 되어 보니 과거 자신이 기자란 칼날을 얼마나 날카롭게 휘둘렀는지 알게 됐다고 하셨다. 선배는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제발 그런 기자 말고 너그러운 기자가 됐으면 해"라고 강조하셨다.


선배 말을 들으니 언젠가 한 엔터테인먼트 홍보 담당자가 말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 담당자는 "연예 매체 기자들과 통화할 땐 우리 사정을 주저리 설명해도 끝까지 들어준다. 근데 종합지 사회부 기자들은 다짜고짜 전화해서 사실이 맞는지만 듣길 원한다"고 했었다. 이 말을 들을 당시에도, 이날 선배 말을 들으면서도 조금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당장 이날 하루 동안 취재를 하면서 이 사례들과 엇비슷한 모습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는 마치 내 머릿속을 들어와 보신 것 같았다. 이같은 말들이 오고간 뒤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은 "부디 딴 생각 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자로 남아주길 바란다"였기 때문이다. 최근 일과 관련해 여러가지 좋지 못한 상황들이 겹치며 이날 자리를 함께한 선배 동기들과도 기자를 택한 우리가 잘못이다란 자조적 목소리를 주고 받았었다. 그런 후배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한 선배는 우리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먼저 당신이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를 던지신 것이다.


이같은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고 가니 어느새 식당 마감 시간이 다가왔고 우린 자리를 파하게 됐다. 언제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고 무리 중 막내였던 내가 용기내어 손을 들었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음을 요즘 많이 깨닫곤 하는데 최근 가진 식사 자리 가운데 이렇게 편하고 좋았던 적이 없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돌아가는 길에 사진과 함께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문자를 선배에게 보냈다. 그러자 곧장 날라온 선배의 답장은 이랬다. "뭘해도 뜻한대로 잘 될 거야, 20년 짬 그냥 먹은 건 아니니까, 다만 조급해하지 마시길"이라고. 그리고 덧붙이신 말은 이랬다. 잔소리가 필요하면 다른 누구는 몰라도 너는 콜이라고. 당장 때려치고 싶은 이 생활, 그래도 어느 것과 견줄 수 없는 큰 스승 같은 선배를 만났다는 감사함에 괜스레 울컥해졌었다.

작가의 이전글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버지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