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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Apr 03. 2024

불쑥 꺼내진 그곳의 나날들

시드니는 지상철을 타며 풍경을 실컷 볼 수 있어 좋다. Paul 제공

일을 하다가 우연히 휴대전화 메모장을 보게 됐다. 재미난 내용이 없을까 싶어 수년전 내용까지 들춰봤다. 그러다가 어학연수 때 남겨뒀던 일기를 발견했다. 당시 유행하던 애플리케이션으로 작성했던 걸 문서화해 저장해둔 것이었다.


어떤 내용이 있나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하루 동안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기분과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나름 상세하게 기술돼 있었다. 비영리취재팀을 론칭할 당시 적었던 내용도 있었다. 그날의 감정을 깊이있게 다루진 않았지만 무언가 후련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제는 아득해진 어학연수 기간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일기에 적혀있던 감정 대부분은 외로움에 관한 것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5일 뒤 곧바로 떠났기에 다시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여행과 사는 건 다르다고 하지 않나. 낯선 땅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건 참 쉽지 않았다. 현지 친구들이 있었지만 한국 고유의 정을 쉽게 느낄 순 없었다. 마음을 깊숙히 나눌 곳이 전무했던 난 주말이 되면 쇼핑몰을 찾아 허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가족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시끄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던 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복잡미묘한 감정이었다.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그랬던 것 같다. 문자와 SNS로 아쉬운 마음을 가득 보내줬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도착해 공항버스정류장에서 아버지 차를 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무언가 쉽지 않은 퀘스트를 하나 처리한 기분이었다. 모든 시간이 꿈만 같았고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이후 햇수로 4년이 지나서야 다시 호주를 찾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취준을 앞두고 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힘들었지만 원하는 꿈을 구체화해 나아갈 수 있는 동기를 얻었던 지난 시절을 발판삼아 또 다시 무언가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한가지 결심을 찾아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결심은 기자로 입직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원동력이 됐고 수년간 꿈을 쫓아가는 데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독한 코로나 기간을 끝낸 지난해 4월 다시 시드니 공항을 찾을 수 있었다. 3년 만에 돌아간 호주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중이었다. 이로 인해 약간의 이질적인 마음이 있었지만 여전한 분위기가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그땐 그랬지란 추억을 곱씹으며 그리움에서 뻗어나온 위로가 주는 쉼을 누릴 수 있었다. 지도를 보지 않고 구석구석을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감사인지 새삼 느끼기도 했다.


올해 다시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질지 알지는 못한다. 사실 기회라는 건 내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당장 오늘 저녁 8시에 예정된 비행기를 타면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런 대책없는 철이 부족한 어른이 되는 걸까. 돈은 있는데 이제는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최근 선배와 식사를 하며 나눴던 이 말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사진첩을 열어 화창했던 그곳들의 장면을 천천히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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