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에게 보내는 편지'(대니얼 고틀립, 문학동네)
둘째 아이의 유치원 상담을 갔다. 아이는 자신의 선생님과 엄마가 마주 앉아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흥분 상태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엄마와 가족들이 아닌 타인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 인생 첫 선생님과의 만남이니, 아이에겐 대단한 사건이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이는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가 궁금한지, 연신 무슨 이야기를 했냐며 묻는다.
"응.. 00가 유치원에서 친구들이랑 너무 사이좋게 잘 지낸다더라?"
"응, 또?"
"그리고 글씨도 너무 예쁘게 쓴다고 칭찬하시더라."
"응, 또?"
"또 00 덕분에 반 분위기가 너무 좋아진다고 칭찬하셨어."
"응, 또?"
그렇게 여러 번 '응, 또?'를 반복하고 나니,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선생님과 한 이야기의 전부라고 이야기하고 넘어가려는 나를 아이가 제지한다.
"엄마, 그럼 아까 한 얘기 처음부터 다시 해봐"
예상치 못한 아이의 말에, 운전하다 말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진심인가?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 큰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00가 친구들이랑 너무 잘 지낸대"
"응, 또?"
"그리고 양보도 잘한대"
"응, 또?"
아이는 계속 묻고 물었다. 그리고 칭찬을 들을 때마다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이 눈빛이 반짝거렸다. 세상 행복하게 웃으면서.... 그런 아이를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내가 얼마나 칭찬에 인색했던지를 돌아보았다. 좀 더 잘했으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 칭찬하기 주저했던 모습을 반성했다. 잘한 것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걸 이야기하느라, 고개 숙인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엄마로서 아이의 행복보다 더 바라는 게 있을까. 칭찬만큼 값없이 맘껏 줄 수 있는 게 또 있던가.
'샘에게 보내는 편지'(대니얼 고틀립, 문학동네)는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정신과 전문의 할아버지가 자폐 진단을 받은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책이다. 아이가 자라 세상과 만나면서 받게 될 상처를 생각하며 할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샘,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해 줄
사람 곁으로.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네가 어제
가졌었 것들에 대한
갈망은 줄어들고,
네가 오늘 가진 것들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금 내 앞에서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의 칭찬을 기대하는 아이도 자라면서 수많은 세상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또 셀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할수만 있다면 아이 세상 속에서 머물며 눈과 귀도 막아주고, 아이보다 앞서나가 울퉁불퉁, 거친 길도 닦아주고 싶다. 하지만, 어디 그게 될 법한 소리인가. 그렇게 되어서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샘에게 보내는 편지' 속 아이가 받을 상처를 염려하는 할아버지의 편지는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보다 앞서나가 아이의 방패막이되어 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넘어지고 상처받았을 때 찾아와 다시 일어설 힘을 충전할 수 있는 곳, 그 '곁'을 내어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리라.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이가 '널 사랑하는 사람,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 해줄' 사람의 곁이 필요할 때 올 수 있는 그 '곁'을 만드는 일이다. 나는 지금 아이가 상처를 안고 찾아올 수 있는 곳, 지친 다리를 질질 끌고 들어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주고 있을까.
아이가 어리니, 그 표정에서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엄마의 칭찬에 아이는 얼마나 행복했던 걸까. 지금의 너는 참 잘하고 있다는 엄마의, 선생님의 인정에 아이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칭찬에는 그런 힘이 있다. 자신에게 만족스러워지고, 자신감을 갖게 하는 힘 말이다. 아이는 아마 아이를 둘러싼 '인정'의 눈빛을 상상하며 흡족하게 유치원에 들어설 것이다. 나를 인정해주는 선생님과 부모가 있다는 믿음으로, 아이는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더 번쩍 들 테고,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더 먼저 다가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아이는 더 나은 자신을 상상하고, 더 단단한 자신을 만들어갈 것이다.
대니얼 고틀립은 그의 책에서 손자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네가 입은 상처가 아무리 깊더라도, 그 상처가 아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네 안에' 있다.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고통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고 보살펴주면 된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여전히 서툰 엄마지만, 오늘도 좀 더 노력해 봐야겠다. 너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지금 모습 그대로 엄만 네가 너무 흡족하다고 아이의 빛나는 눈을 보며 이야기해 줘야겠다. 그 믿음이 아이에게 전해져 어떤 상처든, 그 상처가 아무는데 필요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믿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아이의 상처가 아무는 시간 동안 담담히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자리를 지금부터 만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