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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타 May 22. 2021

왜 나는 쓰려고 하는가 혹은 왜 나는 쓰는가

<키아로스타미의 길> 을 보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2005


1. 에필로그

"영화는 10분의 1초로 폭파되는 다이너마이트로 감옥 그 자체인 이 세계를 산산조각냈으며, 이제 우리는 사방에 흩어진 잔해와 파편들 사이에서 여유자적 모험을 떠난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2.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속 영화이야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코로나 사태로 이 세계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 불멸의 징후 끝에 영화만이 이 세계를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이미 옴짝달짝 못하는 우리의 손을 잡고 다시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모험과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안심시킨다. (비록 지금은 시청각적 한계에 갇혀있지만 메타버스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3. 현대물리학의 양자이론은 우리가 사물을 주시하지 않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다가 우리가 사물을 주시하는 순간 나타난다고(현시) 한다. 즉, 내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소중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것은 치매의 공포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살아가고 있지만 내 주위에 것들이 나의 마음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생각.

그 끔찍하고도 황망한 생각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었다. 영화를 보는 2시간여의 시간이 온전히 내 곁에 머물게 한 뒤에 엔딩크레딧과 함께 서둘러 짐을 챙겨 떠나가는(사랑하는)영화를 어떻게 내 곁에 잠시 더 머무르게 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영화를 보고 난후 반추하고 생각하는 그 때, 영화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조금 더 영화의 희미한 옷자락을 잠시 매만질수 있었다. 봄꽃들이 며칠사이에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일수록 빨리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더 느끼고 더 쓸어 담고 싶었다.

4.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잠시동안 죽었다가 태어난다. 아주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나의 감각을 가장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영화속 이야기와 인물들과 마음껏 동일시를 하다 보면 나의 세계는 한계를 모르고 넓어짐을 느낀다. 프레임 하나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망. 영화가 이대로 영영 끝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영화 속 한줄기 빛이 이끄는 곳으로 마치 구원의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빠져들었다 나오면 몸도 마음도 치유되고 정화되어 있음을 느낀다.

5. "사물들의 반짝임을 그 자체로 온전히 경험하는 것, 그대로의 예술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전 손택)-해석에 반대한다.

과잉생산된 욕망들과 쏟아지는 이야기들의 무절제함, 걷잡을 수 없는 혼잡함, 디지털 피로감의 홍수 속에서 무엇인가 한 곳에 집중할 수 없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온전히 무엇을 하나만 경험한다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러나 주시하지 않으면 삶도 영화도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진리. 영화관은 온전히 하나의 세계에 나를 던져 넣는 마법의 장소이다.

그렇다. 영화를 보는 그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영화관에서 이루어지는 그 세계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대상을 이야기하거나 기록에 남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나의 영화이야기는 날카로운 분석과 이론적 해석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의 편파적인 기록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읽고 그 영화를 수고로이 찾아보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난 다음의 그녀의 말에 물개박수를 쳤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에로틱)이다" -수전 손택

- 무엇을 쓸 것인가

1.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알려진 영화를 포함해 모두 약 3천편 정도를 봤고, 1,500편에 달하는 장편 혹은 단편의 글을 쓴 이후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었다. 영화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하루에 한편의 글을 미친듯이 써 댄 댓가로 글은 한 군데 차분히 모여있지 않고 흩어져있었다. 그 열정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덕후를 넘어 영화광의 심정으로 글을 모아 책으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독립출판의 형식이 될 것같다. 운이 좋아 성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조금 있다.

2. 2016년 강남역 사건을 접하며 페미니즘영화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모든 이론이 그렇지만 서양-백인-중산층지식인-남성의 이론이 거의 모든 영화를 재단하고 해석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속에서 여성은 실존하지 못하고 남성들에 의해 타자화되고 해석당해 왔다. 나는 분노했고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이었다. 굉장히 늦었지만 나의(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영화사에 남겨진 중요한 작품들 중심으로 다시 쓰고 최근에 본 영화들은 새롭게 재해석 할 것이다.

3. 두번째는 독창적 사유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영화 내러티브의 독창성이든 형식과 스타일의 혁신이든 여러번 질문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들에 대한 나만의 목록을 만들고 싶다.

4. 세번째는 언제든 삶이 힘들고 아득해 질 때마다 다시 또 꺼내보고 싶은 나의 최애 영화들을 정리하고 싶다. 매년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해서 보고 있는 왕가위와 짐 자무시 감독의 시를 닮은 영화들 같은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롱숏, 롱테이크 영화나 오드리 헵번의 옛 할리우드 영화들도 최애목록에 들어간다. 그 영화들은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5. 마지막으로 영화가 품고 있는 인문학의, 철학의 사유의 힘을 믿고 싶다.영화가 곧 삶과 세계와의 관계를 다룬 매체라면 영화는 철학에 다름아니다. 철학이란 삶이고 존재에 관한 모든 것이고 세계 그 자체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체험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은 어떻게 나를 구원했나.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인 글쓰기는 결국 세상을 구원한다. 내가 없으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세계-내-존재)는 하이데거 존재론의 전제, 즉 글쓰기는 세상을 나의 관점으로 다시 창조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이 나를 기쁘게 할 때 나도 구원되고 나와 관계맺은 세상도 구원된다.

이것이 불교철학의 '연기설'이다. 이 글을 쓰면서 또 다시 내가 구원받고 있듯이.

6.예술은 늘 인간을 치유하고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 가는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한다 고로 우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꾼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빅터 플랭클린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소소하게 때로 진지하게 감히 내 사유는 철학적 인식을 생산하고 내 문장은 시가 되고 싶은 꿈을 꾼다. "시를 꿈꾸지 않는 문장은 시시하다"고 어떤 평론가는 말했다. 그 말을 요즈음 절실히 새기고 있다.

프롤로그

"감독은 일종의 철학자가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술가인 것이며,그의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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