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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타 Jun 08. 2021

찰리 채플린 최고의 인생연기      <모던타임즈 >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1936

영화 #모던타임즈  #찰리채플린  1936
영화사100대걸작 14   영화에세이 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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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쉴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앞에서 나사를 돌리는 공장노동자와 함께 시작된 영화는 길에서 만난 고아소녀와 어디론가 모를 곳으로 떠나는 소실점과 함께 끝을 맺는다.

2. 1930년대 미국근대 산업화 풍경은 폭동과 실업이라는 신문글자처럼 황량하다. 찰리 채플린이 공장과 길거리와 정신병원과 감옥사이를 오가며 좌충우돌 소동을 피우는 슬프고도 기이한 사회풍자 코미디는 마치 ADHD환자같다. 어느곳에도 안정되지 못하고 내몰리는 찰리 채플린은 기계로부터 버림받더니 시간으로부터도 버림받는다. "더빨리, 더 많은 생산을, 적은 비용으로"를 경전으로 받드는 공장사장에게 채플린은 기계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나사를 조이다 잠깐 겨드랑이를 긁는순간 생산공정에 차질이 생기고 채플린은 기계안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가 잠시 휴식시간에 담배를 피워무는 화장실에서조차 사장의 CCTV는 그에게 호통을 친다. 밥 먹은 시간도 아깝다며 자동 급식기계를 들이미는 세일즈맨들, ( 나치즘시대 독일에서 공장노동자들의 점심시간을 없애기 위해 과학자들이 알약을 개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가장 슬프고도 웃긴 장면은 나사를 조이기만 하는 무한반복의 노동형벌을 재현하던 채플린이 동그란 것만 보면 조이려드는 강박신경증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급기야 그는 또 하나의 근대적 통제공간인 정신병원에 가둬진다. 몇년 후 실업자가 되어 거리로 나간 채플린은 시위주동자로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힌다. 사면을 해주려는 교도소장에게 "여기에 더 있으면 안되나요?" 말한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감옥이 이미  사회보다 더 나은 곳이라는 역설. 그는 어떻게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아소녀의 절도를 대신 뒤집어쓰고 경찰앞에서 일부러 무전취식을 한다.
찰리가 만나게 된 소녀의 아버지는 실업자고, 소녀는 먹고살기 위해 도둑질을 한다. 소녀의 아버지는 길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살해된다. 찰리와 함께 공장에서 일했던 빅빌은 파업으로 강도가 된다. 며칠 뒤 공장 재개 소식에 실업자들이 몰려들지만 그마저도 하루도 안 가 다시 파업에 돌입한다.


3. 빈곤과 소득 불균형 문제를 굳이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당시 미국상황은 이렇다. 국민의 1%가 전체 소득의 8분의 7을 차지할 정도로 빈부 격차가 심각했고, 극빈자는 1천만명에 달했으며,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이 주당 60시간이나 된 반면,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산업재해율이 높은 반면, 이에 대한 보상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파업을 했지만 기업가들은 이들을 대신해 이민자나 흑인을 노동자로 고용하는 방식으로 공백을 메웠다. 기업들은 경제력을 이용해 정부, 법원, 언론을 매수하려 했다. 노동자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저항법은 파업뿐이었다.
〈모던 타임즈〉에서도 몇 차례 파업 장면이 보이지만 길거리엔 실업자와 부랑자수와 맞먹는 경찰들이다. 이들은 도처에 있고 언제든 그 누가 말썽을 피우면 그 즉시 달려오는 슈퍼맨들이다. 병원, 공장, 감옥, 경찰서로 대변되는 철저한 통제와 감시권력의 사회를 이렇게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있을까 미셸푸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이미 우리를 꼼짝없이 가두어 놓고 쳇바퀴 돌리고 있다.


4. 알려진 바와같이 채플린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 영화에서의 설정은 거의 자전적인 것과 다를바 없어 보인다. 아버지는 댄스홀에서 알려진 가수였고, 어머니는 댄서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하자 홀로 찰스와 그의 이복동생을 키우던 어머니는 정신쇠약 증세로 죽을 때까지 정신병원에서, 찰스와 이복동생은 공공보호시설에서 지내게 된다. 찰리 채플린은 10살 때부터 나막신 춤 등 주로 코믹한 연기에 두각을 나타냈고, 1908년에는 런던 프레드 카르노의 무언 코미디언 극단에 합류한다. 이때 마임 기술 등을 익혔다. 어린 시절의 체험이 반영된 떠돌이 캐릭터는 그의 마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채플린의 블랙유머는 대부분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마임 연기에서 빛을 발한다.

5. 어렵게 일자리를 얻게 된 까페에서 가수와 댄서로 인기를 얻으려는 찰나 또다시 경찰에 쫓겨 거리로 몰린 채플린과 소녀는 주저앉아 울고 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지금 우리의 현실과 1930년대가 그리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바우만의 말대로 우리도 언제든 거리로 내몰릴수 있는 "잉여쓰레기들"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을 먹고 사는 때깔만 좋은 시대에 화려하게 장식된 백화점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6. 채플린은 이 영화를 시작으로 FBI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고 <위대한 독재자>를 찍고 정치적 망명을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희망의 아름다움이 아닌 , 절망의 정의로움" 을 사유하는 채플린 영화는 9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그의 우스꽝스러운 마임연기는 우습지 않고 웃프다. 아니 오히려 갓 태어난 예수의 표정만큼이나 숭고해 보인다. 적어도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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