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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May 17. 2024

두 집

기형도와 이진명의 시

길을 걷는다.

언제 나섰는지 기억도 까마득한 길

사연이 많았던 것 같지만 히미해지고

지금의 길만 이어지는데,

문득 한적한 길에 들어섰다.

자그맣고 하얀 집이 길가에 가만히 앉아있다.

창문은 어둡고 지붕은 낮고 단정한 집.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젊은 시인이 살았다고 하는데

듣기로 그는 떠났다는데

어쩐지 영영 떠난 것 같지 않은 조용하고 작은 집.

아직도 집을 감싸고 있는 시인의 향기.


그 이웃에 또 한 집이 있어서

허름하지만 다정하다.




여름에 대한 기록

이진명


나는 한 아름다운 집을 기억합니다

여름에 그 집은 더욱 아름다웠고 하염없었습니다

그 집은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의 한 동네

막다른 길 끝에 있었습니다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한여름에도 동네 길을 오릅니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야트막했고

제일 헐어 보였습니다

기와지붕은 비닐로 덧대고 돌로 눌러놓았습니다

대문은 나무로 짠 구식이었는데

하늘색 칠이 거의 벗겨진 채였습니다

이 집 사람들은 기와 고칠 염도

대문을 새로 칠할 염도 내지 않으려나 봅니다

그렇게 여름날의 산책에서 그 집을 처음 보았습니다

집 모양새에 비해 뒤 터는 아주 넓었습니다

주위의 새로 지은 이층집 덩치들도

그 넓은 뒤 터는 막지 못했습니다

무 배추 상추 쑥갓 시금치 파 고추

뒤 터는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이름의 푸른 것들이 한껏

일궈져 있었습니다

담장에 붙어 까치발을 하면 그것들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집의 노인네였을 테지요

양손에 호미와 물뿌리개를 나눠 든 노인네

호미와 물뿌리개를 놓고 다시

저쪽 가에서 물 대는 호스를 끌고 오는 노인네

노인네는 구부정한 등 펴는 법 없어

담장에 붙어선 나와 마주친 적 없습니다

한여름 내내 쉬는 날의 산책은 그 집을 향했습니다

동네의 막다른 길 끝

그러나 뒤 터 한쪽은 하늘까지라도 뚫렸지요

푸른 것들의 이름을 읽으려

담장에 붙어 까치발하곤 하던 나날

노인네 안 보이면

햇빛 아래 놓여진 빈 물뿌리개

푸른 것들 속에 끌어당겨진 호스를 대신 보았습니다

상추 시금치 쑥갓...

하고 읽어가다가

담 밑 어느 결에 놓여진

그물끈이 풀어졌을 그물의자를 대신 보았습니다

그물의자 등에 수건이 걸쳐져 있는 것을 대신 보았습니다

여름 햇빛은 그 집의 뒤 터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쏟아지는 이미지처럼

담장에 매달린 내 얼굴은 그 여름 내내

사과알로 발갛게 만들어져갔습니다




이 집 너머로는 길이 없다는데

뒷마당은  넓은 뒤터가 하늘까지 뚫렸다는데

실제로 그럴지는 가보기 전까지는 모르지.

그 사이 뭔가 변했을지도.

노인은 돌아가시고 시인의 발간 사과알은 시들었을지도.

하지만 전해 들은 담 안의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시인이 살았다는 집과 시인이 기억하는 집이

꿈처럼 이웃해 있다.

두 집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막다른 길을 돌아 나온다.

아마도 짐작건대 어떤 길이 있어서

어디로 이끌지 아직은 모르는 어떤 길이 있어서

나보다 현명한 두 발이 이끄는 데로

내 길을 걷는다.




*기형도, <잎속의 검은 잎>(1989)

* 이진명,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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