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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Jun 21. 2024

예술가라는 운명

내 인생의 후반부는 그저 똑바로 서 있기 위한 투쟁이었다. 나의 길은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있는 절벽 가장자리로 이끌었다. 나는 돌과 돌 사이를 뛰어넘어야 했다. 가끔은 그 길로부터 도망쳐 사람들 사이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매번 다시 절벽 위의 길로 돌아와야 했다. 그것이 심연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걸어야 할 나의 길이다. 내 정신이 각성을 한 이후로 삶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내 예술은 개인적인 고백이었다. 그것은 가라앉는 배에서 무전 전신기사가 보내는 경고 전신과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불안이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며, 나의 병 역시 마찬가지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병이 없었다면 나는 키를 잃은 배와도 같았을 것이다.


뭉크의 말이다. 그의 이 말로 나는 뭉크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이 투쟁일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지 몰라도 더 치명적으로 투쟁하고 더 깎아지른 절벽 가장자리를 걷는 소수가 있다. 운명이라는 말은 그 소수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말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예술가라면 투쟁의 자취를 작품으로 남긴다는 점이 남다를 뿐이다. 뭉크는 예술가이자 인간이었다고 정의하면 이상할까. 그만큼 그에게는 예술과 삶이 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던 것 같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에드바르 뭉크의 전시회를 보고 뭉크가  <절규>의 화가 그 이상이라고 느꼈다. <절규>로 뭉크의 예술 세계와 삶을 설명한다면 일관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뭉크가 예술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치러낸 도전과 용기를 무시하는 결과가 될 것 같다. 그 자신이 고백하듯, 뭉크는 보통의 삶을 살지 못했고 살아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주저함, 불안이 그를 병적으로 지배했고, 세상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영원한 국외자이자 소외자라는 느낌을 안고 살았다.


<베르겐에서의 자화상>, 1916.


나를 비난하지 마. 대신 내가 삶을 살고 있지도,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슬퍼해줘. 나는 그저 고통스러운 열망을 품고 창가에 앉아 나를 둘러싼 끔찍하도록 시끄럽고 낯선 삶의 소란을 지켜볼 뿐이야.


연인 툴라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사랑했지만 결국 파탄으로 끝나버린 툴라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은 뭉크에게 큰 정신적 상처를 안겼고, 뭉크는 이때의 상처로 자신의 인생이 지옥처럼 변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세상으로 나가 부딪히는 것으로 응전했던 것 같다. 숨지 않고 싸우는 것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가 손에 쥔 무기는 붓이었다.


<붓을 든 자화상>, 1904


그의 강렬하고 무서운 그림들은 악몽을 꾸게 한다. 내면을 고스란히 열어젖혀서 보여주는 그의 화폭은 피가 흐르고 정신착란적인 원색들로 뒤덮여서 감상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겨우 재워놓은 무의식의 괴수를 깨워 일으킨다.


나는 그의 끔찍한 그림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숙제하듯 그의 그림들을 똑바로 보고도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러기를 잘한 것 같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그 뜨거운 삶의 지옥불을 예술이라는 창과 방패를 쥐고 끝까지 통과해 내는 것을 목격했으니.



<지옥에서의 자화상>, 1903


 

뭉크를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졌을 리는 없다. 격렬한 지옥불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지켜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나는 예술에서 삶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그 의미를 찾으려 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났다. '다른 사람들이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말에 마음의 경계가 마침내 무너졌다. 오만한 사람들은 말한다. 누군가가 평균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못났거나 유난하거나 태생적 문제가 있거나 등등의 이유로 스스로 그것을 자초한 것이며 스스로 자기 삶을 망친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누가 지옥 속에서 살고 싶었겠는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없다. 삶의 상자를 받아 들고 그것을 열어보기 전까지 우리는 그 안에 든 운명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의 고통을 대신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예수처럼 뭉크는 예술가로서 시대의 질병과 인류의 불안을 대신해서 앓았던 건 아닐까 싶다. 그토록 격렬한 삶을 견디고 나아간 용기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또한 그의 헌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뭉크는 살면서 보통의 한 남자로서 보통의 사랑을 한 번도 하지 못했지만, 다음 생이 있어서 그 생에서는 다정하고 너그럽고 웃음 많은 여인과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한 잉에보르그 케우린>  



* 인용된 뭉크의 말들은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 예경, 2013)에서 가져왔습니다. 뭉크가 그린 자화상들에 특히 집중해서 그의 예술과 삶을 분석한 이 뛰어난 전기는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뭉크 전시회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중요한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대지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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