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덮을 때가 되었네요. 마주 앉아서 서먹했던 첫 만남 이후로 우리는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이는 수다스럽지 않았어요. 아니 그 반대였죠. 우리는 말없이 앉아있었습니다.
정적.
그래도 긴 침묵 끝에 한 마디, 긴 침묵이 흐르고 다시 한 마디, 그렇게 조금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그이가 한 짧은 말을 되새겨 보곤 했어요. 때로는 '사랑, 사랑, 사랑'이라고 그이는 말했어요. 때로는 "저는 아름다움을 찬미합니다."라고 낮게 중얼거리기도 했죠. 가끔은 얼굴이 어두워지기도 했습니다. 마치 구름이 해를 가리듯이. 어느 날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전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해요."
누구는 그이가 수다스럽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과묵한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달변가였던 걸까, 의아했어요. 무슨 말을 그리 많이 하더냐고 물어보았죠. 쉴 새 없이 떠드는데 말재주가 사람을 홀리게 하는 데가 있더라네요. 그러면서 덧붙이더군요. "세상 물정에 아주 밝은 사람 같어. 사람 마음을 기가 막히게 읽더라고."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어요. "그런데 도가 좀 지나친 데가 있어... 너무 나가..." 비밀인 냥 귓속말도 했어요. "그 사람, 질투가 심해."
그이가 속물이라고 흉보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상스럽고 조악하다고까지 말하더군요. 정말이요?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 젊은 남자를 사랑하는 모양인데, 여자로 태어날 사람에게 자연이 하나를 더 붙이는 바람에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라고 했다나. 나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물건을 달게 하여.(소네트20) 하하, 저는 크게 웃었습니다.
참 모를 사람이더군요, 그이는.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이에요. 제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사람. 높은 이마에 구름과 바람과 꽃그림자가 지나가는 것 같던 사람.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을 보일지라도 나와 만날 때는 오래 침묵하던 사람. 제 눈에는 그이의 이마가 참으로 지혜롭게 보였습니다. 희고 맑은 이마가 말이에요.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이가 저에게 반으로 접은 종이 한 장을 손에 가만히 쥐어주더군요. "행복하세요." 조용히 말하며 돌아서는 그를 잠시 눈으로 좇다가 종이를 펴보았어요. 거기에는 시 한 편이 단정히 적혀있었습니다.
나의 사랑을 우상숭배라고 부르지 마세요,
나의 애인이 우상화되었다고 여기지도 마세요,
나의 노래와 찬사가 언제나
하나를 향하고, 하나에 대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해서.
나의 연인은 오늘도 다정하고, 내일도 다정하여,
놀랍도록 한결같아요.
그러므로 나의 시는 불변의 법칙에 매여,
한 가지만을 표현하며, 다른 것은 버립니다.
아름다움, 다정함, 진실함이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며,
아름다움, 다정함, 진실함은 다른 말로 변주되고 있을 뿐,
내가 지어내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말이에요.
하나 속의 세 주제는 무한히 다양하게 나타나니,
아름다움, 다정함, 진실함은 종종 혼자 거주하는 일은 있어도,
셋이서 하나 속에 함께 자리한 적은 지금껏 없었답니다.
그동안 셰익스피어와 즐거우셨나요? 저는 아주 조금 시인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말하시네요. 그를 읽고도 비인간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와 함께 시를 읽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 위에 인용한 시는 소네트 105번입니다.
* 대문 그림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6-1593)의 <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