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작년에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란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영상미도 좋았지만, 사랑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영화였습니다. 마츠코란 여자는 어린 시절부터 결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랑에 있어 앞뒤를가리지 않습니다. 마츠코는 사랑에 있어 항상의존적이었으며,연인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불사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사랑법이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해서 뜨겁게 타버린 연탄재를 연상시키도 하더군요. 마츠코를 영화에선 '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의 삶은비록 초라하고 비참하게 끝이 나지만 누군가에게 그녀는 신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츠코처럼 불타버리는 것도 멋있겠다! 심지어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네, 분명 누군가에겐 마츠코 같은 사랑법이 너무 필요합니다. 특히, 요즘 젊은층(저를 포함?)에겐 합리성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이것저것 따지는 사랑법이 문제긴 하니까요. 합리를 따지게 되면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상대를 상품화하며, 마치 물물거래를 하듯이 서로를 대합니다. 매우 방어적이고, 희생은커녕 조금도 손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비혼주의, 저출산 같은 요즘 풍토도 사랑에 과도한 합리를 따지기 때문이아닐까 싶습니다. 이와 다르게 되돌려 받길 바라지 않고, 주는 것에 의미를 갖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마츠코는 분명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에게 사랑을 주는 주체가 망가져 버린다면요? 주기만 하고 희생하는 것에만 매몰된 채 자신을 책임지지 않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유지될까요. 사랑에 있어 지속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기술 중에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홀로 있을 수 있을 것, 즉 사랑하는 사람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책임지고, 잘 돌봐야 하는 것이죠. 영화에서는 모를까 현실에서는 마츠코 같은 자기 파괴적인 사랑이 결코 아름답게 보일 수 없습니다. 자기 파괴는 결국 상대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주고, 결국 모두가 상처받기 때문이죠. 결국자기 자신을 돌보는 동시에 상대방도 돌봐야 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사랑을 위한 기술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맹목적인 감정이 아닌 차갑지만 따뜻한 이성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진정으로줄 수 있는' 기술이 무엇인지 때론 차갑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랜 세월 많이 걷는다고 , 걷기 선수가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을 오래, 많이 한다고,사랑을 많이 안다고 사랑고수가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도 깊게 사유하여 기술을 갈고닦아 연마하는 과정이 분명히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