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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기 Jul 12. 2021

7월 12일: 슬기로운 고립의 시작



창문을 조금 열어놓은 탓에 햇빛을 받으며 일어났다. 알람이 먼저인지, 햇빛이 눈가에 닿은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이미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밴 회사원에게 무엇이 먼저인지는 의미가 없다.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체크, 거리두기 4단계 속 슬기로운 고립 계획 1. 아침 햇살 받으며 일어나기.


양치질을 하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평소에는 피곤한 직장인들 대열에 합류해 지하철 역에 멍하니 서 있을 시간에, 노란 여름 이불을 덮고 뒹굴거리니 잠시 기분이 좋았다. 이불이 서걱거리며 피부에 와닿는 느낌을 만끽하다가, 손을 뻗어 책을 읽어주는 앱을 켰다. 마침 새로 산 책이다. 여주인공이 짝사랑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절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어공부 겸 듣는 게 아니었으면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는 왠지 안 어울리니까. 체크, 계획 2. 영어 원서 듣기.


창 틈새로 비치던 햇살이 잦아드니 어느새 출근 30분 전이다. 이불 위에 흘뿌려뒀던 여유를 거두어 들일 때다. 이제 이불 위에 노란 꽃무늬만이 남았다. 이틀 전에 아몬드유에 재워놓고 까먹은 압착 귀리를 후루룩 마시고 노트북을 켰다. 월요일은 보고와 회의의 연속이다. 검은 노트북이 세상의 전부인 양 쳐다보며 전쟁을 치른다.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고, 보고하고, 묻는 말에 대답하고, 의견을 나누고... 그러다 보니 정신없이 오전 시간이 갔다.


라면을 후루룩 끓여먹고 누워서 시간을 죽이려 게임을 좀 하다가,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또 회의의 연속이다. 내용이 심각하진 않았고, 간간히 농담도 한다. 회의가 끝나니 저번 주부터 하던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 업무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업무량을 체크해가며 집중하다가, 쉬었다가 하면서 일을 처리한다. 6시 2분, 내가 한 단락의 표를 마무리 짓자, 엄마가 카톡을 보냈다. ‘퇴근하자!’


조금 더 할까 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월요일부터 야근을 하면 한 주가 피곤하니까, 하면서 노트북을 껐다. 이번에는 몇 번 손 본 끝에 팔 길이만큼 주욱 찢어져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겨울 이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구청에 수거 접수를 해놓은지라 오늘 내다 버리지 않을 수도 없다. 그 밖에 자질구레한 일들을 어떻게 한 번에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쓰레기를 버리고 나를 먹일 밥과 반찬, 체리 한 봉지까지 사들고 왔는데 원래 사려던 건 또 까먹었다. 음, 내일 사지 뭐.


카레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운동을 했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다. 나는 은밀히 춤을 즐긴다. 작년 초, 갑자기 시작된 재택근무로 약을 먹지 않고 버티고 있던 우울이 예상치 못하게 심해졌을 때, 나를 구원한 것이 춤이었다. 나 혼자 영상을 따고 안무를 외우고 춤을 추고 있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굳이 춤을 나가서 춰야만 하는 대학교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신입사원 연수 외에는 취미로 춤을 춘 적이 없다. 우울이 찾아오고 나서는 더 그랬다. 한 때는 침대 밑에 떨어진 머리칼도 주을 수 없었을 때도 있었으니까. 밥벌이를 다시 시작한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 하나의 안무를 배워나갔고, 내 몸의 움직임을 조절해 모양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다시 느꼈다. 내 보잘것없는 몸으로 선을 그리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원초적인 즐거움 그 이상의 무언가다. 노랫말과 리듬에 따라 나는 다른 존재가 된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운동 겸 기분전환으로 춤을 추고 있다. 땀을 내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머릿속에 그려놓은 대로 하루가 마무리된 느낌이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글을 쓰러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방금 시간을 확인하니 9시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적당한 시간이다. 1년 동안 내 몸에 쌓은 데이터로 홀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잘 터득했다고 결론 내린다. 나는 6년 전, 잊고 있었던 일들이 되살아나며 갑자기 우울에 늪에 빠진 나, 그 상태로 서울에서 온전히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생활하며 취업준비를 하다가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워졌던 5년 전의 나, 취업에 성공했지만 퇴근할 때마다 일부러 지하철 2개 역을 걸어가며 내내 울었던 4년 전의 나, 모든 걸 거부한 채 집안에 틀어박혔던 3년 전의 나, 그리고 갑작스러운 재택근무로 다시 우울의 함정에 빠졌던 나를 기억하며 오늘을 잘 보냈다, 마음을 토닥인다.


알고 있다. 온전히 나만을 돌보는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 자레가 요즘 흔치 않은 행운임을. 오늘 하루가 어떤 조그만 사건으로도 어그러지지 않은 것조차 행운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의 구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인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이 난리통에 모두 무사하길 잠시 바란다.


첫 단추를 잘 꿰었다. 거리두기 4단계로 인한 고립 아닌 고립 속에서, 우울에 걸려들지 않고 슬기롭게 하루를 보내기 위한 모든 항목에 자랑스러운 빨간 체크 표시가 챙겼다. 아, 마트에서 한 가지 빼놓고 산 것은 잊도록 하자. 사소한 거니까. 시작은 언제나처럼 성공적이었다. 나의 고질적인 문제는, 끝이 미약하다는 것인데, 이 나날들의 끝은 언제인지도 모르는 게 문제다. 일단 덮어두자, 오늘의 끝은 성공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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