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 를 읽고
엊그제 발레 공연을 보았다. ‘성숙한 관람 매너로 공연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안내 멘트에 이어 모든 조명이 꺼지자 공연장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들 공연을 많이 다녀봤는지 박수 타이밍도 잘 맞고,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다가도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고요해지는 순발력도 대단했다.
처음 안내 멘트처럼 관객의 호응도 공연의 일부라는 걸 실감하던 그때, 1막 2장부터였나? 박수 사이로 좀 과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처음엔 저분 엄청 감동하셨구나 싶어서 웃어넘겼는데 환호성이 점점 크고 높아지자 약간 거슬리기 시작했다. 귀가 한번 트이니 박수타임마다 그쪽으로 절로 눈길이 갔고 결국 누군지 알게 됐다. 그러다 공연 중 무심코 그분을 보게 됐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계시는 게 아닌가. 어, 뭐지, 정작 공연은 안 보시고 환호성만 그렇게??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공연이 끝나고 세 번의 커튼콜이 이어졌다. 모두들 받은 감동이 커서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두 번째 커튼콜부터 이젠 제법 익숙해진 그분의 환호성이 잦아들었다. 어쩐 일인지 어둠을 뚫고 서둘러 나가고 계셨다. 나는 세 번째 커튼콜까지 감동의 여운을 실컷 누린 뒤 나섰고 지하철 쪽으로 부지런히 걷는 중에 앞서가던 여성 한 무리가 나누는 그분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 뭐야? 누구 팬이야?” “그러게 찐 팬인가 봐” “아유 무슨 찐팬? 거의 취객이던데.” 내 귀에만 크게 들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취객까진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섰는데 아까 전에 나간 그분이 서 계신 게 아닌가. 스크린 도어 앞에 바짝 선 그분은 흰 지팡이를 들고 계셨다.
돌아오는 밤길, 수많은 생각 위로 얼마 전 읽은 이 책이 떠올랐다. 읽는 내내 너무 좋아서 만나는 분들께 신이 나서 소개했던 책. 작가의 집요한 자기반성에 공감하고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는 내 안의 편견을 수없이 확인하게 만든 책. 시각장애인 친구와 미술관에 갔다는 저자의 경험이 나의 일상에서, 내 눈앞에서도 일어난 그날, 그분의 달뜬 표정을 보며 감동을 넘은 감격과 기쁨을 넘은 환희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날 공연 중에 고개를 푹 숙인 먼발치의 그분 모습을 보며 ‘혹시, 시각장애인이신가’ 잠시 잠깐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곧 ‘설마’ 시각장애인이 ‘혼자’ 발레 공연을? 이라며 자연스레 올라오는 편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딱 거기까지라는 걸 깨닫자 부끄러웠다. 삶이 되지 못하는 읽음이 무슨 소용 있나 싶어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커튼콜 동영상을 돌려보자, 아니 돌려 듣자 그분의 환호성이 다르게 들렸다. 무대 위의 무용수와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한 오케스트라를 향한 박수와 함성 속에는 ‘함께’ 하는 그 순간의 기쁨과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을 향한 벅찬 감동이 빈틈없이 담겼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도 ‘그분’과 발레 공연 감상을 나누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모쪼록 발레 사랑을 꾸준히 이어가시길, 그 무엇도 그분의 발레 사랑을 방해할지 못하는 세상을 함께 꿈꾸며 잠시나마 은근히 품었던 핀잔의 빚을 혼자 갚아 본다.
#눈이보이지않는친구와예술을보러가다 #가와우치아리오 #다다서재
P405-408 영상 속의 호시노 씨는 예전에 참가했던 시각장애 관련 연수의 이야기를 했다. 그 연수에서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 안대를 쓰고 시각장애 모의 체험을 했다는데, 호시노 씨는 그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안대를 쓰면 일단 시각장애인처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연수가 끝나고 안대를 벗으면 다들 이렇게 말해. 와, 보인다, 보여. 보이는 건 역시 대단해! 그러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무슨 게임이라도 하면서 논 거냐고.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안대를 쓰는 건 정말이지 어리석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야. 따지고 보면, 나는 겐의 머릿속에 억지로 들어가지 않아. 감각에도 개입하지 않아. 그저 가까이 다가갈 뿐이에요. 그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시각장애인의 마음이 되어본다는 시점에서 이미 틀려먹은 거야. 그 틀려먹은 생각이 세계를 뒤덮고 있어요.’ 그래도 호시노 씨, 눈이 보이는 사람이 안대를 쓰고 지내보는 건 상상력을 발휘하는 계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 저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직면한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지만. 화면 속의 호시노 씨는 이어서 내 반론을 강하게 부정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어. 심신이 피폐해져서 방 안에 틀어박힌 우울증 환자로도, ADHD 인 사람으로도 될 수 없어. 시각장애인도 될 수 없고, 그 외에 누구도 우리는 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되어볼 수 없다고요! 될 수 없는데, 되자고 생각하는 천박한 생각만이 얄팍하게 폼을 잡는 그런 사회인 거예요. 지금의 사회는. 그래서 불쾌해!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나서서 되는대로 “와아아아!” 하고 싶은 거예요. 이 세계에서 웃고 싶어요.’(...) 그러니 호시노 씨가 말하고 싶어한 것은 상상력보다도 가까이 있는 부분이었다. 다가가는 것밖에 못할까? 아니, 그야 그렇지만, 다가간 다음에는? 이 세계에서 웃고 싶어요. 이 말이었다. 나는 어째서 시라토리 씨, 마이티와 함께 작품들을 보았을까.(...) 작품이 잘 보인다든지, 새로운 발견을 한다든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감각과 머릿속을 상상하고 싶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으면서 웃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끝까지 파고들면 모두 그 한마디로 집약된다. (...) ‘그림을 보는 활동 말이야. 확실히 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런 활동으로 그림을 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해, 나도 겐지도. 그냥,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거죠.’ 나는 영상을 멈췄다. 응, 그 말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