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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Dec 27. 2019

짜증내는 아빠

한동안 아이에게 짜증을 많이 냈다. 통증 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한두 번 내던 짜증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무엇 때문에 짜증을 냈을까. 크게 세 가지 상황이 있다. 첫째, 사방팔방에 늘어진 장난감을 볼 때다. 벌여놓기만 하고 치우지 않는 장난감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와중에 새로운 장난감을 또 가지고 나오면 그때는 화가 솟구쳤다. “먼저 저기에 늘어놓은 것부터 치우고!” 이 한마디에 정말 딱 그것만 치우는 아이. 아니 그마저도 억지로 치우는 척하다가 1분도 안 돼서 치우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보면 속이 뒤집혔다.


둘째, 밥 먹으면서 한눈팔 때. 식사 때마다 밥 먹으란 말을 한 30번은 외친다. 그래 한눈팔 수 있다. 나도 밥만 쳐다보면서 먹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그 한 눈이 가만 내버려 두면 5분, 10분을 간다. 한입 베어 물고는 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책을 본다. 어디까지 하나 지켜봤더니 책 한 권을 다 볼 때까지 고작 대여섯 번 오물거리는 게 전부다. 이 기세라면 밥 한 끼 먹는데 족히 두 시간은 넘게 걸린다. ‘밥 먹을 때 책보는 걸로 뭐라 하지 마라. 천천히 먹어야 건강에 좋다.’ 일단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이야기지. 곧 있으면 등원해야 하는데 세월아 네월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짜증이 난다.


셋째, 씻을 때. 치약 묻힌 칫솔을 입에 쑥 집어놓고 화장실 밖으로 기어 나온다. “들어가 닦아!” 축 처진 어깨로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지만 10초도 안 되어 물소리가 난다. 대청소를 하고 있다. 화장실 깨끗해지면 좋지. 칫솔만 부지런히 움직여 준다면야. 하지만 아이는 칫솔질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 침이 함빡 고일 때까지 물고만 있다. 아니면 잘근잘근 씹거나. 그러다 그 작은 입으로 감당이 안 되면 퉤 하고 뱉는다. 이를 닦는 건지 치약을 넣다 빼는 건지 모르겠다. 머리 감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잔소리하지 않으면 머리 감는 데만도 하세월이다. 두어 번 머리를 문지르다가 바로 화장실 벽에 거품을 칠한다. “머리!” 못 이기는 척 머리에 손을 스윽 올리지만 10초도 안 되어 다시 손이 벽으로 향한다. “머리!” 다시 머리로, 그리고 벽으로. 이 짓이 몇 년째인지.


이상의 이유로 짜증을 내다보니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분명한 건 아이가 미운 것은 아니다. 물론 미울 때도 있지만 순간이다. 어떤 부모가 아이를 원수처럼 여기겠나.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뻐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를 내가 미워할 리 없다. 미워하는 건 아이의 행동이다. 당연히 내 짜증의 대상도 그 행동이고. 그런데 정작 아빠의 잔소리를 듣는 건 아이다. 아빠는 싫은 소리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아내도 피해자다. 옆에서 듣고 있기가 힘들었을게다.


“애한테 그만 좀 해”

“내가 어디 매번 그래? 당신도 알잖아. 내가 언제 그러는지. 장난감 안 치울 때, 밥 안 먹을 때, 안 씻고 장난칠 때.”


그러고 보니 매일이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짜증 내는 아빠가 되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짜증 내지 말아야지, 화내지 말아야지. 참아야지, 참아야지. 그런데 얼마 못 갔다. 마음이 평온하면 대체로 의지는 이성에 복종한다. 하지만 예고 없이 솟구쳐 오르는 짜증과 분노에 이성이 휩싸이면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내 의지란 건 생각보다 믿을 게 못 된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기는 격이랄까.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마루에 늘어진 장난감을 보며 집이 더러워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 우리 집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아이가 지나간 흔적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장난감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증거인 셈이었다. 증거가 차고 넘쳐서 발 디딜 틈마저 없어지면 여전히 화딱지가 나긴 하지만 전만큼은 아니다. 씻을 때도 그렇다. 제 머리가 아닌 화장실 벽에 열심히 비누칠 하는 아이를 보며 ‘이 아이가 없었다면 이런 모습을 볼 일도 없었겠지’라는 생각 먼저 한다. 물론 적당한 선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밥 먹을 때, 이 닦을 때 딴짓 하는 걸 그냥 넘기기란 여전히 쉽지가 않다. 특히 아이의 건강과 관련되어 있어서 더욱 그렇다. 언젠가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빠가 하는 말을 지키는 게 너무 힘들고 그래?”

“그건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만 까먹어.”


하긴 그럴 나이지. 세상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모든 게 익숙하겠어. 머리 감다가 벽에 비누칠하고 혼자 자지러지는 게 당연하다. 유치원 오가며 보는 풍경과 엄마아빠랑 나들이하며 보는 풍경이 자기가 본 세상의 전부인데, 책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니 얼마나 신기할까. 그 와중에 “밥 먹어”, “머리 감아”라는 소리에 반응하는 걸 보면 나름 아이도 아빠 말을 들으려 노력한 것이다. 작은 몸으로 꿈같은 세상과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려니 얼마나 바쁠까. 우리 아들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기특하다. 아빠가 짜증 줄일게. 완벽하진 않겠지만 어제보다는 나아지려 노력할게. 그러니까 앞으로 열 번 얘기할 거 두 번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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