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일수록 점집이 성행한단다. 점 보러 가는 이들의 절절한 사연을 모두 알 순 없지만, 최소한 운명이란 정해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한다. 생각이 바뀌면 태도가, 태도가 바뀌면 습관이, 습관이 바뀌면 심지어 운명도 바꿀 수 있다고. 매일 새벽에 책을 읽는 분들을 보면, 피곤해도 하루 10분 이상 꼭 운동하는 분들을 보면, 바쁜 가운데도 각종 모임에 참석하여 끊임없지 자기계발을 하는 분들을 보면 제아무리 운명이라도 바뀔 것 같긴 하다. 왜 멱살캐리라고 하지 않던가. 제아무리 운명이 땅바닥에 붙은 껌처럼 꼼짝 않고 버틴대도 그런 사람들은 기어이 운명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워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것 같다.
정해진 운명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많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부모·형제는 타고난다. 금줄에 고추와 송 가지가 걸리는 것도 운명이고, 솔가지와 숯이 걸리는 것도 운명이다. 아무리 때 빼고 광내도 언젠가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지리란 것도 변함없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몇몇 것들은 정해진 운명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우리 선택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살맛 나지 않겠나. 가치 있지 않겠나. “무슨 소리, 정해진 운명을 살아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한다면야 “그렇군요.”라고 대답은 하겠지만 아마 마음속으로는 ‘거 되게 따분하겠네.’라고 생각할 것 같다. 정해진 길을 그저 따라 걷는 것이 인생이라면 부산행 KTX와 다를 게 뭔가.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믿는다. 양심적으로 살 수도 있고 계산적으로 살 수도 있다. 베짱이처럼 나태하게 살 수도 있고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살 수도 있다. 새벽에 독서를 할 수도 있고 알람을 집어 던질 수도 있다.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배우자와 함께 살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독야청청 나 홀로 살 수도 있다. 한눈팔지 않는 믿음직한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틈날 때마다 애인을 만나러 갈 수도 있다. 아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남들이 좋다는 건 다 시키면서 틀에 가둬버리는 부모가 될 수도 있다. 간간한 음식으로 위를 편하게 할 수도 있고, 맵고 짠 음식으로 각종 위장병에 시달릴 수도 있다.
우리에겐 운명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운명은 바꿀 수 있다. 그러려면 습관이 바뀌어야 하고, 그 전에 태도가 바뀌어야 하고, 그 전에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한동안 생각에 참 관심이 많았다. 내 생각이 정말 내 생각인지, 아니면 그동안 보고 배운 남의 생각을 흉내만 내고 있는지.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였다. 나만의 생각이란 것을 가져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옆 나라 부호가 “35살까지 가난한 건 네 책임이다.”라고 하면 그냥 그런 줄 알았다. 내 생각이랄 게 없으니 그런 말이 옳은지 그른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 따지지도 않았다.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대로 살았을 적에 나는 참 많이도 바빴고 근심·걱정도 많았다. 폭풍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위태로운 돛단배처럼.
나만의 생각을 갖고 싶었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에 질문을 던졌고, 어설프지만 나만의 답을 써 내려갔다. 옳고 그름을 섣불리 따지지 않았다. 때로는 게을러 보이고, 한심해 보이고, 야망이 없어 보여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내 생각이라 믿었다. 그러자 위태했지만 확고하게 나만의 생각이 쌓여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공은 무엇인지, 좋은 남편 혹은 아빠란 무엇인지, 좋은 아들은 무엇인지.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는 인생의 기준을 가장 나다운 것들로 싹 다 바꿨다. 바뀐 생각으로 살다 보니 누구 말대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뀌었다. 여러 가지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더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더 실체 없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가지지 못했지만 가져야만 할 것 같은 것들로 애타지 않는다. 나는 분명 전보다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기 위한 노력
시선의 사각지대로 나아가다
최근에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생각은 바꿨지만 여전히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는데 그 곳으로 시선을 넓히려 노력 중이다. 개별현상에 의미부여 하는 일은 배고픈 치타처럼 빠르지만, 그 가운데 본질을 바라보는 일엔 배부른 굼벵이처럼 느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일 필요가 있다. 방향이 보였으니 가면 된다. 물론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피로감이 상당하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사랑과 은혜밖에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 외에는 대가가 따른다. 변하려 하는데 불편하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다행히 나는 요즘 매우 불편하다. 익숙지 않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명품 백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것처럼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독서 진도가 느린 것은 덤이다. 누군가 무섭게 쫓아오는데 발걸음이 죽어라고 안 떼어지는 꿈처럼 한 장 한 장이 버겁다.
그런데도 하는 이유는 재미있어서다. 나를 움직이는 팔 할은 재미다. 운명이니 뭐니,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결국 재미가 있어야 하는 그런 아주 평범한 인간인지라 나는 재미가 없으면 못 하겠더라. 한창 영업을 할 때도 동기들은 모두 골프를 배웠지만 나는 몇 달 해보니까 재미없어서 그만뒀다. 요즘엔 전과 달리 술자리도 거의 갖질 않는데 이유인즉슨 재미가 없어서다. 대화는 커피숍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나. 취해서 하는 이야기치고 인생에 살이 되고 피가 될 만한 게 별로 없기도 하고. 아무튼 나란 인간은 재미가 중요하다. 나 혼자 알고 킥킥거리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시간 들여 글을 쓰는 이유도 재미있어서다.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이지만 그래도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재밌어서다. 그리고 그 어떤 재미보다 나란 인간의 허점을 발견하고 하나씩 채워 가는 재미보다 낫진 않더라. 그런 이유로 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추고자 기꺼이 사서 고생을 한다.
기대도 된다. 운명이 바뀌었는지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생각을 바꿔서 전보다 더 행복해지지 않았나. 새로운 생각까지 추가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기대가 될 수밖에. 당장 불편하긴 하지만 다행히 즐기고 있다. 지금의 불편함이 마치 원래 내 것처럼 자연스러워질 때 나는 더 많은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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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형 / 프리랜서 작가, 브런치 작가, 기업 블로그 마케터. 2019년 6월.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을 출간했습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 담았습니다. <네이버 인문 화제의 신간10> <YES24 2019 여름 교양 필독서>에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