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난 크리스천이면서도 그동안 성경 읽기를 소홀히 했다. 인생의 사소한 목표인 ‘책 한 권 쓰기’를 달성하려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가. 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삶의 의미’를 찾는 데 가장 중요한 성경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니.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다.
성경은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내가 보는 개역개정판은 1,754페이지에 달하고 글씨도 빽빽하다. 성경은 지금껏 2,800개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맨 처음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성경은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쓰였다. 이후 라틴어로, 영어로,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다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된 번역이라도 내용이 와닿지 않는 부분이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 그럴 때는 영어로 봐야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고대어까지 거슬러 가야 하는 수고도 해야 한다. 시대도, 문화도 다르고, 한 글자에 이중, 삼중의 의미를 담았던 고대어를 현대어로 완벽히 번역하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바'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성경은 인생의 바른 기준을 알려준다
성경을 보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두 가지만 말해 보려 한다. 성경은 인생의 바른 기준을 알려준다. 사람의 인생이란 끝없는 선택의 문제다. 어떤 선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50분에 일어날까 55분에 일어날까. 이 학교에 갈까 저 학교에 갈까. 밥을 먹을까 빵을 먹을까. 상추를 심을까 호박을 심을까. 반면 어떤 선택은 중요하다. 아무도 없는데 슬쩍 가져갈까 말까. 이혼할까 더 노력해서 관계를 회복할까. 몰래 바람을 피워볼까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지킬까.
한 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변하는 사람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습관적인 선택으로 인생을 쌓아간다. 일단 태어났으니 산다든지,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살 생각이라면 그때그때 선택의 기준을 달리해도 아무 상관 없겠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싶다거나, 자녀에게 모범이 되고 싶다거나, 바르게 살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바른 기준을 갖출 필요가 있다. 기분이 꿀꿀해서 밥 대신 빵을 먹을 순 있겠지만, 같은 이유로 바람을 피워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이를 위해 법을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에 불과하다. 그것만 지키면 아주 문제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최소한의 양심도 없고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법대로 하라’며 안하무인인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가. 어떤 이는 자신을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오로지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는 믿음이리라. 하지만 누구를 만나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건을 겪느냐에 따라 거의 무한대로 변하는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어떤 길이 바른 길인가
많은 것이 상대적으로 바뀌고 있다. 자극적인 정보와 거짓 정보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 말해주기조차 애매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미 왔는지도 모르겠다. 죄가 드러났을 때 잘못을 반성하기보단 들켜서 아쉬워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걸 보면. 이왕 걸렸으니 까짓것 벌금 내면 되고, 심할 경우 감방에서 몇 년 살다 나오면 된다는 식이다. 어쩌면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다.
기분 따라, 시간에 따라 선악을 바꿔 해석하지 않는 굳건한 기준이 필요하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나에게는 관대한 기준이 아닌, 잘못은 잘못임을 알려주는 기준.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스스로 양심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기준. 지키지 않았을 때보다 지켰을 때 내가 더 선한 사람이 되고 더 믿을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아니 자주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금 기회를 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가진 기준이 필요하다.
나에겐 그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선악의 기준을 바꾼 적도 없다.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으로 늘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하고 불편한 이웃은 더욱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힘든 사람을 두고 이자 놀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내를 내 몸같이 사랑하라 가르친다. 죽고 나면 사라질 것들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죄를 지어도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돌아오면 마치 없던 일처럼 해주신다고 가르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성경은 나를 가치있게 만들어 준다
게다가 성경은 내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가르친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원인인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으며 특별히 사람은 당신의 형상을 본 따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진흙을 물에 개어서 대충 사람 형상으로 만들고 호흡을 불어넣으신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흙’의 히브리어 원어는 ‘아파르’, 즉 땅의 미세한 입자를 가리키는 티끌이자,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아주 기본적인 입자인 원소를 의미한다.
원자번호 113, 니호니움. (출처: www.sci-news.com)
2016년 6월 모리타 고스케 교수의 연구진이 새 원소 니호니움(Nihonium)을 발견했다. 아연(Zn)의 이온을 광속의 10%로 가속하여 무려 9년간 400조 회를 돌린 끝에 간신히 비스무트(Bi)와 충돌 시켜 만들어낸 것이다. 막대한 돈과 수년의 시간을 쏟아부어야 간신히 새로운 원소 하나를 만들까 말까다. 그나마도 일대일로 충돌시켰을 때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지구상에 존재하는 원소는 수소에서 우라늄까지 총 92종이다. 이 원소들을 일대 다로, 다대다로 충돌시킨다면, 또한 그렇게 만들어낸 새 원소들까지 실험에 포함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구의 거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분명한 건 알면 알수록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옛날 옛날 한 마을에 개똥이란 머슴이 있었다. 너무 어릴 적에 팔려 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불쌍한 개똥이. 하루는 대감님 심부름으로 물건을 사러 장에 갔다가 우연히 자기 부모님을 안다는 사람을 만났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저희 부모님은 누구시죠?” 첫 번째 대답. “네가 부모가 어딨어. 그냥 아무 데서나 왔겠지” 두 번째 대답, “사실 너의 부모님은 옆 나라 임금이다. 전쟁 통에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그게 바로 너란다” 어떤 대답이 개똥이의 자존감을 높여 주겠는가. 자신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게 만들겠는가.
성경은 불변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 기준에 맞게 산다면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책이며 동시에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가치를 높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고 가장 많이 설교 되는 책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 번도 성경을 본 적이 없다면, 혹은 보다가 말았거나, 눈으로만 한번 대충 훑고 지나갔다면, 세상에서 가장 공의로운 기준을 모르고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더 많은 유익이 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이미 꽤 근사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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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형 / 프리랜서 작가, 브런치 작가, 기업 블로그 마케터. 2019년 6월.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을 출간했습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 담았습니다. <네이버 인문 화제의 신간10> <YES24 2019 여름 교양 필독서>에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