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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엽 Oct 27. 2021

감자국 춘천 닭갈비

“엄마는 왜 그렇게 할머니한테 못되게 굴어? 내가 엄마한테 그랬으면 좋겠어?”

외할머니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아빠 차 뒷좌석에서 내가 불평했다.


그쯤에 외할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나는 아홉살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할머니는 장위동에서 감자탕과 닭갈비 장사를 하셨다. 간판의 이름은 그냥 빨간색으로 “감자국 춘천 닭갈비”. 식당 이름이 곧 메뉴였다. 우리 집에서 할머니 가게는 걸어서 10분 거리 동네라서 종종 엄마는 나를 데리고 할머니 가게로 놀러가곤 했다. 내가 놀러가는 날이면 할머니는 활짝 웃으시면서 내 갈비뼈가 부러질 듯 안아주셨다. 그걸로 모자라 여기저기 뽀뽀를 하셨는데 그게 그렇게 싫었다.  감자국에서는 희미하게 나는 돼지 누린내가 할머니가 안아줄때는 진하게 났다. 나를 쓰다듬어 주시는 손도 나무껍질같았다. 심지어는 입술도 그랬다. 그럴때면 나는 인상과 안간힘을 쓰며 겨우겨우 할머니 품을 벗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억척’이었다.


할머니가 한밤중에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지신 것을 할아버지가 발견해서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가족들중 그 누구도 할머니가 쓰러지신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다시 본 할머니의 모습은 할머니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빡빡머리에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어..어” 정도만 할 줄 아는 바보 같았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젊은 사람보다 더 까맣게 염색하고 뽀글거리는  머리에 감자국 냄새가 나는 우리 엄마의 엄마였다. 저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라고 부정했다. 심지어 한쪽 팔과 한쪽 다리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모들도 삼촌들도 할아버지도 우리 엄마 아빠도 전부 병원 침대 앞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를 이리저리 꼬집고 자꾸 아픈사람 귀찮게 시비를 걸고 했다.

“엄마! 아니 해봐 아니”

“으…어”

“안그러면 계속 꼬집고 괴롭힐거야, 싫으면 아니라고 말해야지. 따라해봐 아-니이-.”

“어.. 어..”

그러는 내내 할머니가 싱글벙글 한것도 싫었다. 아니, 하루아침에 한쪽 팔다리도 못쓰게 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왜 싱글벙글하지 할머니는 머리도 어떻게 된게 분명해.


20대 30대이던 결혼 안한 이모 삼촌들과 유일하게 결혼한 장녀 우리 엄마, 우리 아빠 그리고 나까지 의사선생님과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앞에다가 호두처럼 생긴 흑백사진을 붙여 놓고 이렇다 저렇다 했는데, 저게 할머니 뇌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수술을 하면 다시 말을 할 수 있다는 건지. 수술을 하면 안된다는 건지 어떨때는 이렇게 말하다가 어떨때는 저렇게 말했다. 설명이 끝나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만큼이나 이해 못한 표정이었다. 할머니를 괴롭힐때와 달리 우리 엄마는 울고 있었다.

 

수술은 잘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말도 못하고,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뒤 할머니는 경희 대학병원에서 집으로 옮겨 오셨다. 외갓집에는 휠체어가 놓였다. 화장실로 가는 벽에는 긴 철제 손잡이를 달았다.


달라진 것은 할머니 뿐인데, 그때 온 가족은 같은 기차를 타고 그 기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할머니 였나보다. 기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하룻밤에 휠체어 신세가 되었어니 기차가 제대로 움직일리 없었다. 기차의 방향은 제 멋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큰이모도 작은 이모도 일을 그만두었다. 작은이모와 큰이모가 같이 “감자국 춘천 닭갈비”를 하며 할머니를 돌봤다. 큰삼촌은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호프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중국에 유학갔던 작은 삼촌은 급히 귀국해서 몇년을 쉬었다.


여전히 엄마랑 나는 할머니를 보러 놀러갔다. 할머니는 활짝 웃으시면서 한쪽 손으로 내 손을 부서져라 꽉 쥐셨다. 할머니한테서는 다른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이제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으면 혼자 해결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이제 싫지 않다는게 싫었다. 여전히 할머니가  ‘억척’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할머니가 말을 하게되고 걸어다니게 되는 기적같은 것은 없었다. 어느  갑자기 할머니가 건강을 찾아 여행을 다니며 행복하게 남은 인생을 즐기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주에 있을 때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엄마가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연락했다. 9살이던 나는 24살이었다. 나는 20살이 넘어 내가 하고싶은대로 살았다. 여행이 가고싶으면 여행을 가고 살고싶은 곳이 있으면 살았다. 할머니는 그 세월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혼자 보내셨다. 돌아가시기 몇년전부터는 묻히게 될 납골당 근처의 요양원에 계셨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처럼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안 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비행기표를 사서 한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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