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영문 모를 사인으로 세상과 작별한 고인 앞에서, 살아 있는 자들도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우리와 그들 사이의 엄숙한 침묵 만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 환자들로 분주했던 외래 진료실은 네 명의 의료진과 그들을 5미터 남짓 거리에 두고 죽 늘어선 고인의 가족들로 인해, 흡사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치하고 있는 법정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 가족들 중에는 슬픔에 잠긴 사람과 그 슬픔을 다독이는 사람, 슬픔을 넘어 분노로 가득 찬 사람과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 힘든 듯 맥없이 앉아있는 사람,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여 잘잘못을 따져 묻기 위해 한껏 날을 세운 표정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수술을 집도한 A교수 뒤에서 나는 지난 5일 간의 기억을 되짚는 것을 멈추고, 각기 다른 감정을 갖고 마주 선 유가족들을 어떤 말로 위로 해야 할지 가늠하며 혼란에 빠졌다. 불편한 정적도 잠시, A교수가 먼저 입을 떼었다.
“제가 수술을 집도한 A입니다. 고인이 된 환자분의 명복을 빌고, 곁에서 상실감이 크실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여기 오늘 여러분을 뵙게 된 이유는, 환자분과 관련해서 궁금해하실 부분이 있다면 아는 한 상세히 말씀드리고, 조금이나마 여러분의 마음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어떤식으로든 도와드리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주시면 저도 성의껏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칠순을 넘긴 할머니의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오른쪽 무릎이었다. 인공관절 삽입은 성공적이었지만, 원인 모를 혈압 저하와 패혈증이 이어졌다. 중환자실에 내려간 뒤, 환자는 3일을 못 버티고 생을 마감했다. 학회 일정으로 수술 다음날 출국하는 바람에 해외에서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교수님은 지금 이 첫마디를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하였으리라…
교수님의 맞은 편에서 수술을 제1보조하였던 나의 기억에도 수술 과정 중이나 전후로 잘못 된 것은 없었다. 수술 다음 날 아침에도, 혈압이 약간 저하되어 있고, 맥박이 조금 상승되어 있었지만, 다른 피검사 수치나 컨디션에 큰 지장은 없었다. 회진 때 우리를 향해 빨리 재활운동 해야 하는데 관찰 실에 나와 있어서 불안하다며, 오히려 재활의 의지로 가득 차 있었던, 조금은 급한 성격의 할머니였다.
“저는 환자의 큰 아들 되는 사람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게 된 정확한 원인이 도대체 뭡니까?”
제일 당연한 질문이지만, 쉽게 답변할 수도 없었다. 수술 다음날 오후에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거의 실시간으로 내과, 중환자의학과의 협진이 이루어졌다. 중환자실로 급하게 옮겼지만 전신적인 발열은 없었고, 수술부위는 물론이거니와 CT, 초음파에서도 혈압저하와 관련하여 뚜렷한 원인이 될 만한 부분은 없었다. 수술 부위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정형외과적으로는 딱히 할 수 있는 처치는 없었다. 협진과에서도 환자의 불안한 생체징후에 대응할 뿐, 명확한 원인 대신 여러가지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나에게 굳이 문제라고 한다면 그건 교수님의 부재였다. 3년 전, 해외에 부재중이었던 교수님을 대신하여 추석 연휴 내내 수술 후 합병증으로 위독해진 환자 옆을 맴돌았던 치프 레지던트 때가 떠올랐다. 담당하고 있는 교수님의 부재는 혹자에게는 한숨 돌리는 여유가 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꼭 환자로 고생하게 되는 징크스 같은 것이 있었다. 회복과는 멀어져 가는 환자의 감시 장비 화면과 검사 결과지 앞에서, 나는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불안해하는 보호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그러니까 함께 좋은 소식이 찾아오길 기도해보자는 말 밖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저희는 정말 억울해요. 우리 어머니가… 수 년을… 수 년을 무릎이 아파 고생을 하셨는데, 그것 좀 낫게 해드린다고 했다가… 제대로 작… 작별할 시간도 없이 돌아가시다니… 이게 도대체나 말이 되냐고요!”
큰딸인지 작은딸인지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평생을 뒷바라지해 준 어머니를 갑자기 여의게 되면서, 살아생전 못다한 말이 얼마며 아쉬움의 깊이는 얼마일까... 별안간 그 모든 것들이, 고인의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어버린 병실에서의 짧은 시간들로 투영되었다. 입원기간 중에 서운했던 모든 것들이 경중을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끄집어내어져 우리 앞에 쏟아졌다.
중환자실에 가던 오후는 한 주간의 긴장이 한풀 꺾일 무렵인 금요일 오후였다. 수술 후 환자의 컨디션과 무관하게 일시적으로 혈압이 떨어지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는 수술이 끝난 직후부터 계속 괜찮아질 거라는 말만 들어왔던 터였다. 머리부터 다리까지 의심될 만한 곳은 다 검사를 해보았지만, 딱히 뚜렷한 원인은 없었고 혈압 저하와 빈맥은 잡힐 줄을 몰랐다. 그 때부터 보호자는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의료진을 만나,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여하간 지금은 너무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는 설명을 듣게 된다. 오빠가 동생에게, 동생이 큰 언니에게, 큰 언니가 고모에게… 처음 나와 주치의의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는 여러 명의 전달자와 수신자를 거쳐 서로 다른 기억이 되었다. 그래서 의사는 안타까운 일 앞에서 감정적인 지지는 하더라도, 사과의 표현은 가볍게 할 수가 없다.
쉽게 끝나지 않을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반복되고 반복되어 이제 아무 의미 없이 허공을 맴돌기 시작했다. 고인의 동생의 자제분의 친척 뻘 된다고 자신을 소개한 어떤 한 분이 법적인 자문을 받았다며, 접은 종이를 꺼내 펼쳐 들고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정확히 알 수 있는 부분은 차분히 설명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설명을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가 몇 번 커지기 시작하자 마자, 지친 자는 훨씬 더 지쳤고, 슬픈 자의 슬픔은 눈물이 말라버린 흐느낌으로, 분노한 자의 분노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바깥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호인력과 관계자들이 긴장한 얼굴로 진료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신이 나타나면 이 모든 것을 정리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불안했다.
그때였다.
“아버지…”
각기 다른 표정과 목소리를 내던 그들 틈 한 켠, 중절모와 짙은 색 안경을 끼고, 지팡이를 한 손에 움켜쥔 채 진료실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덤덤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묵묵히 말씀이 없으시던 그 분. 나는 그 분이 이제 막 환자와 사별한 배우자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줄곧 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어르신이 지팡이를 잡은 왼손과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한 걸음…, 두 걸음…. 갑작스런 아내와의 이별, 그리고 어제까지 상을 치루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보였지만, 어르신의 발걸음으로 줄곧 차가웠던 우리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져 갔다. 일순간 소란스럽던 장내가 숙연해지고, 모두가 숨죽여 그 걸음걸이를 지켜보았다.
“교수님, 저희 아버님이십니다. 손 한번 잡아주십시오….”
큰 아들이 아버지의 무거운 걸음을 보다 못해 눈물 젖은 목소리를 토해냈고, 교수님은 걸어오시는 어르신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한 팔로는 등을 감싸 안았다.
“제가…, 제가 환자의 배우자 되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 치와 평생을 함께 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어르신은 그저 그렇게 본인의 안타까움과 괴로움을 덤덤히 몇 마디로 전했다.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누군가의 어머니는, 누군가의 사랑했던 아내는 지금 여기 없다. 어르신께 다가가 우리는 한 명씩 진심 어린 위로를 하였고, 그들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것을 훔치는 모습조차 보이면 안될 것 같아 그냥 턱 어디쯤에 멈춰 마르도록 두었다.
로비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여기저기서 번호대기표 알람음이 연신 울려 대는 가운데, 스피커에서는 이 병원 어딘가 또 위급한 환자가 있음을 알려댔다. 나의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아직도 요동을 치는데, 나는 그것을 빨리 잠재워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주머니에 있던 빵을 꺼내 씹어 물고, 또 다른 환자의 수술을 준비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면서 생각했다.
‘낭만이라고는 정말 찾아볼 수가 없는 직업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