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속엔 자기만의 순대국집이 있지-3
이제는 글로벌한 케이푸드
누구나 가슴 속엔 자기만의 순대국집이 있지ㅡ3
비도 부슬부슬 오고, 지난주 지독한 감기 뒤끝이라 속도 헛헛하여 오늘 점심은 일찌감치 순대국으로 정했다. 약속이 없는 목요일, 12시 반까지 바짝 일하고 적당한 허기감을 느끼며 룰루랄라 발걸음도 가볍게 나의 최애순대국집에 갔다. 손님이 빠지기 시작하는 시간, 자리에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접시에 깍두기를 담고, 밥뚜껑 위에 다대기와 들깨가루, 다진 마늘과 새우젓 국물까지 조금씩 덜어 섞어서 고기와 순대를 찍어 먹을 나만의 소스를 조제하면 준비 끝. 밥뚜껑 위의 소스는 단골들만의 자랑스러운 시그니처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동료는 나의 소스 제조하는 모습을 보더니, "진정한 순대국 마니아의 전문성"이 느껴진다나.
신나게 순대국을 먹는데, 문득 영어가 들려왔다. 저쪽 테이블에서 외국인 손님과 함께 와서 먹는 팀이 있었다. 방금 우르르 들어온 그룹이었는데, 외국인 손님과 함께 온 모양이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분-아마도 이 모험 넘치는 점심식사의 호스트-이 끊임없이 순대국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순대국을 향한 그분의 자부심이 이만치 떨어진 자리의 나에게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음식재료를 버리지 않는 한국인의 알뜰함을 언급하고, 배고픈 서민의 음식이었으나 지금은 건강에 좋은 한국 대표의 음식이라는 설명이 간간이 들렸다. 함께 일하게 된 외국인과 가장 일상적이고 로컬 색깔이 강한 음식을 나누는 것은 손님으로서 격을 갖추어 대접하는 단계를 넘어서 '당신은 나의 친구'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에게도 순대국은 친한 사람과 편하게 먹는 음식이지, 어려운 관계에서 선뜻 제안하지 않는 메뉴가 아닌가. 한층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은 그 결과이기도 하고 어쩌면 의도된 목적이기도 할 것이나, 식당의 그 팀은 이미 왁자지껄 웃음소리와 감탄사를 연신 터뜨리며 화기애애한 것이 식당을 들어설 때와는 분명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저쯤 되면 순대국 오찬이 의도이의 의도와 결과는 이미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한국에서 나눈 인상 깊은 점심의 추억이 되어 있을 테니. 호스트의 순대국에 대한 설명은 이제 깍두기로 넘어가고 국밥의 여정은 중반을 지난 듯했다.
다시 나도 순대국에 집중하며 먹고 있는데 내 옆 테이블에 혼자 온 손님이 대각선 방향으로 앉았다.
"보통 하나 주쎄요."
영어액센트가 묻어있는 한국말로 익숙하게 주문하는 소리에 고개들 들어보니 이번에도 외국인이다(심지어 매우 잘생긴 젊은이^____^).
혹시나 실례가 될까 티 안 나게 흘끔 보니, 이 친구는 이미 순대국에 익숙한 듯, 접시에 깍두기를 덜고는, 들깨가루를 시작으로 거리낌 없이 양념을 순서대로 순대국 뚝배기에 척척 넣었다. 나는 티 안 나게 흘끔흘끔 보았다고 하지만, 이미 그는 주변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그마저도 익숙한 듯 그는 핸드폰의 동영상을 하나 틀어놓고,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문득, 20여 년 전,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내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을 견디며 혼자 순대국을 먹는 것'
사실 예전에는 순대국집에 가면, 젊은 여자들은 거의 없었다. 지역마다, 또는 시간대마다 다를 수 있었겠으나, 20대 후반, 30대 초반 내가 살던 서교동 근처의 순대국밥집에 가면, 시에 나온 대로 하루의 일을 마친 아저씨들이 소주 한 잔 걸치며 먹는 테이블이 대부분이었고, 나는 용감하게 혼자 한 그릇 시켜 먹곤 했다. 이 외국인 청년도 한국에서 순대국밥을 먹던 일을 어딘가에 이렇게 글을 쓰거나, 지인들에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한국에는 지역마다 동네사람만 드나드는 순대국밥집들이 있는데, 저렴한 가격에 양이 푸짐한 이 음식은 정말 완전 로컬 음식이고 외국인들이 먹기에는 생소한 재료들도 많이 들어가서 외국인에게도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한 번 맛을 들이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다채로운 맛이 가히 중독적이며, 동네 순대국집에 가서 주변 한국인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을 견뎌내면서 먹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가 뽑은 2023년 최고의 식당(뉴욕) 1위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돼지곰탕집이더니,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은 당연히 돼지국밥 그리고, 돼지국밥과는 다르지만 한국의 국밥 범주 음식에서 가장 하드코어 레벨에 해당하는 순대국 맛집을 찾아 종주국의 품격을 느꼈을 터. 그런데 큰일이다. 이런 순대국맛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어려울 텐데 ㅠ 한번 순대국 맛들이면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도 자꾸 생각날 텐데..... 저 양반이 일 끝나고 한국을 떠나게 되면 어쩌나...
안 해도 되는 걱정을 사서 하면서 사무실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