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를 지나 횡성 초입의 마을 안흥면에 자리 잡고 있다. 단정히 가꾸어진 밭과 마을을 따라서 말끔히 정비된 도로를 한참을 달렸다.
횡성은 산세가 좋았다. 마을을 둘러싼 늠름하고 기운찬 절벽들이 간밤의 태풍을 막아주어 밭의 작물들은 잎사귀 하나 떨어진 곳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강림순대 간판을 끼고 우회전해서 들어가노라니, 모든 리뷰에서 공통으로 얘기한 바로 그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런 곳에 식당이 있을까?"
밭과 한우 축사를 거쳐 마침내 낡은 집 앞에서 내비는 끝나고 나는 문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 여기 진짜 식당 맞아?"
스릴러 영화에 나올 법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저기요...? 식사 가능한가요..?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고, 마루의 식탁에 혼자 앉아 식사하던 어르신과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다. 안쪽 주방에서 인상 좋으신 사장님이 나와 들어오라고 한다.
순대국과 메밀전병이 나왔다. 강림순대 순대국은 그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고소하고 진한 사골국물에 집에서 직접 담근 강원도 막장을 풀고 시래기와 순대, 고기, 부속이 뻑뻑할 정도로 들어가 있었다. 흡사 크림스튜에 가까운 풍미와 식감이었다. 밥을 말으니 리조또 느낌도 난다. 국물은 떠먹을수록 감칠맛이 입에 감겼다.
강원도 밭과 한우 축사 옆에 있는 식당에서 이런 새로운 맛을 느낄 줄이야. 놀란 나의 입맛을 잠재운 건 얌전히 썰어낸 포기김치였다. 한 입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김치는, 여리한 배추싹 시절부터 이 근처에서 자라나 역시 근처에서 자란 고추 파 양념들과 이 집 주방에서 버무려져 이 집에서 그대로 익은 김치였다. 묵은지에 가까운 오래된 김치지만 배 타고 차 타고 다니며 팔려온 봉지김치와는 다른 집김치의 청순하고 정갈한 맛이 났다. 배 타고 시달리며 운반된 김치는 언뜻 보아 싱싱하고 덜 발효되었어도 뭔가 이미 지치고 닳고 닳은 맛이 난다. 와인만화 "신의 물방울"에서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생산 후 배로 운송된 후에도 여기저기 옮겨졌던 와인과, 생산 후 그 와이너리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다 비행기로 살짝 운반된 와인은 같은 빈티지였지만 20대와 60대 사람처럼 다른 맛을 보였다.
요즘은 음식도 다문화시대라 라면 한 봉지 안에도 최소 10개국에서 들여온 재료가 들어 있다. 너무나 당연해서 개념조차 없던 '로컬푸드'가 용어가 된 이유는 중국산 김치와 스페인산 브로콜리가 우리 식탁에 올라오고 있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동네마트에 흔하디 흔했던 제철채소와 제철 해산물을 이제는 보기 어렵다. 대형 온라인 유통업들이 생산 기간은 짧고 보관이 까다로워 신선도가 떨어지면 품질이 바로 떨어지는 제철 식품을 다양하게 취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굳이 하려는 의지도 없어 보인다. 결국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점점 똑같아질 것이고, 제철음식을 챙겨 먹는다는 것은, 돈과 시간이 여유로운 사람들의 호사나 여가행위가 되어간다. 요즘은 산지에서 택배 직송이 되긴 하지만, 겨울 부산 방어, 가을 양양 송이버섯, 통영의 굴 등을 먹는 것은 일상이라기보다는 이벤트의 영역이다.
...더위가 가신 늦여름, 더없이 어울리는 순대국이었다. 구수하고 고소하고, 진한 국물 속에 배어있는 구수한 막장 향은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정다웠다. 이 전무후무한 순대국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한 마디 더 인사를 전했다. 사장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서울에서 직장 다닌다는 자제 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주인장과 손님들이 나누는 얘기에 이 집 사정을 다 알게 되었다-께서 이 순대국의 진가를 깨닫고 사업으로 확장하면 좋겠어요. 서울에 직영점도 내주시고요. 서울의 노포들은 이미 다 2세 경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답니다.
큰길로 나와 근처 안흥찐빵집에서 갓 찌어낸 빵을 호호 불어먹으니 완벽한 디저트. 마치 시간여행을 하고 온듯한 특별한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