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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Aug 28. 2024

부족함 일기

2030이여, 그리 못나지 않았다!

모든 창작은 결핍에서 나온다


처음 긴 글을 쓴 건 졸업논문이었다. 우리말도 아닌 일본어로 청춘의 공허와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의 세계관 변화에 관해 2만 자를 꾹꾹 써 내려갔다. 일본에서의 첫 취업 준비 후 우울증에 걸린 뒤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다. 책상 좌측에는 인덱스가 덕지덕지 붙은 논문과 서적, 잡지 스크랩을, 우측에는 밀크티 한 팩을 놓고 조그만 노트북을 펼치고 타자 소리에 집중하는 모습이 퍽이나 작가다웠다. 아마도 그때 글을 쓰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담당 교수님도 안 상은 자료를 모아 글을 쓰는 데 소질이 있다고 칭찬해 주었으니 말 다했다. 


카피라이터가 된 지금 작업물에 자아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글은 거울이다. 상업적인 글을 쓸 때도 불쑥 시니컬한 자아가 튀어나와 퇴고를 반복하기 일쑤. 돈 받고 쓰는 글에도 자아가 묻어나기 마련인데 내가 주제를 고른 졸업논문은 오죽하겠는가. 공허함의 깊이와 타자 두들기는 시간은 비례했고, 그 결과 장대한 논문이 완성됐다.






키보드를 두들기는 그 촉감이 좋은데 이걸로 어떻게 돈을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 광고계에 발을 들인 지 5년이 흘렀다. 삶의 의미를 고찰하며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푹 빠져있던 스물넷의 청년은 이제 서른 살 대리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글을 쓰던 내가 이젠 글을 쓰면 쓸수록 공허함에 매몰되어 간다는 것. 


일이 없을 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미숙한 이십 대를 지나 서른이 되면 월 300 정도는 벌며 퇴근 후 모던한 원룸에서 샤워가운을 걸치고 와인 한잔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이제는 꽤나 자주 '나는 왜 살까?' 고민하는 '어른이'가 되었다. 


부모님 건강하시고 가정 화목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당장 먹고살 걱정 대신 다음 네일아트 시안 고민을 하는 나. 남이 보면 행복한 삶일 텐데. 결론은 확실해졌다. 내 공허함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것. 그래서 '나 이렇게 잘 산다' 과시하는 SNS 풍토에 반기를 들어 부족함 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것도 디지털 디톡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가고 싶은 건 내게 없는 것들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해서 자기 연민에 빠지겠다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의미 모를 공허함에 빠지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라는 것. 누가 볼까 두려운 쪽팔린 글이 완성될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글은 거울이니 퇴근 후 짬짬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이상 부족함 일기를 쓰게 된 계기 통찰 끝.


240828(수)

다시 폭염이 시작된 여름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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