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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기정 Aug 10. 2021

베스트셀러와 좋은 책

베스트셀러는 좋은 책일까요?

자기 계발 서적이 도서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삶의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이 많이 팔리는 현상을 보면, 우리가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라 타인의 충실한 노예가 되기 위한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티븐 코비 Steven Covey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이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인 책 중의 하나일 겁니다.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가 팔렸고 한국의 회사원들에게도 거의 필독서였지요. 스티븐 코비는 컨설팅 회사까지 설립해서 글로벌 기업 대상으로 관리자 교육 프로그램까지 개발해서 한국에까지 진출했으니까 대단합니다. 저도 회사원 시절에 심화 교육까지 받은 적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 것뿐 아니라 워크숍까지 포함된 이틀짜리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7가지 지침에 대하여 각각 체크리스트 등을 만들고 그 습관들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에 대해서 각자가 실행계획을 세우고 참가자 각자가 발표까지 합니다. 첫 번째 습관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는 것부터 일곱 번째 ‘끝없이 자신을 쇄신하라’는 것까지 모두 상식적으로 자명한 것들이지만, 그렇게 세부적으로 나름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대단한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논술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인 셈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런 종류의 자기 계발서는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국내 작가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출판되고 있습니다.

 

위안과 희망을 주는 책은 좋은 책이고 많이 팔릴만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네가 옳다, 넌 다 잘 될 거야, 아픈 게 당연해, 너의 잘못이 아니야, 이런 말들이 당장 위로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진실을 말하자면, 어렵고 힘든 상황일 때는 사실에 근거해서 본질을 파악하고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자세가 우선입니다.    

   

론다 번 Rhonda Byrne이 쓴 <시크릿>은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최단시간 내에 500만 부가 팔렸다는 책입니다. 한국에서도 몇 년 동안 베스트셀러였지요. 저는 사실 부제목이 너무 상업적인 느낌이라 거부감이 일어나서 그 책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읽어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책이 팔린 부수의 10%라도 성공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을까요? 이 책에서 말하는 비밀이란 ‘끌어당김의 법칙 Law of attraction’이라는데 기본적으로 간절히 바라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생각은 자석이며 주파수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신비주의적 자기 암시법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잠들기 전에 좋은 생각을 하라는 식의 암시는 나쁠 건 없겠지요. 나쁜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크릿>의 저자는 자신의 회사가 손실이 커져서 회사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회계사가 숫자를 들여다보며 안달복달을 하고 있는 나쁜 상황에서 자신은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며 좋은 생각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우주가 자신의 소망을 이뤄줄 거라고 온몸으로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이 이 책의 중간쯤 나오는데 이후는 대충 훑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이 책이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한국에서도 출판되자마자 빅히트를 쳤다고 합니다. 현대인이 아프기는 많이 아픈 모양입니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이라든지 발표를 잘하는 법, 회의를 잘 진행하는 법 등 구체적인 주제에 대해서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들은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책입니다. 하지만 성공의 비밀이나 부자가 되는 법을 말하는 책을 한두 권 읽고 실제로 성공하거나 부자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처한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려면 진실을 제대로 보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따뜻한 위로는 좋은 것이지만 위로일 뿐입니다. 고통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자기 계발 서적은 해답집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받기보다는 해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마음이 급한 현대인은 빠른 답을 얻고자 자기 계발서나 당장 마음에 위안이 되는 책으로 향합니다. 문제를 자기 힘으로 풀어보는 것이 아니라 해답집의 풀이 과정만 보며 수학 공부를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참고서로 공부해도 스스로 고생해서 풀어보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면 수학 실력은 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계발서의 모범 답안만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개인의 역량이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책에서 제시하는 답안을 참고해서 각자가 고민하고 사색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행해야 역량은 늘어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해답이나 위안을 담은 책은 베스트셀러일수록 오히려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획일적인 똑같은 방법으로 역량강화를 꾀한다면 개성의 부재로 차별성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Baltasar Gracian이라는 스페인의 성직자가 있었습니다. 철학자이자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7세기에 이미 모든 인생 지침서의 전형이 된 책 <계시와 처세술>을 썼습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인생살이에 대한 조언 수백 가지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책입니다. 인생의 철학적 방향뿐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라’는 가르침도 있는 걸 보면 아주 현실적인 인생철학입니다. 저자 자신도 ‘생존을 위한 보신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환상과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보았습니다. 회의론자였지요. 그는 예수회 소속으로 글을 쓰고 강의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비판자>라는 소설이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주교중 하나인 몬트로 추기경으로부터 핍박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일생동안 관찰한 모든 것을 담았다는 <계시>라는 책의 원고는 압수당해 처음에는 출판조차 되지 못합니다. 그가 이미 쓴 책들은 금서가 되고 사라고사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시골로 쫓겨나는 등 심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다행히 나중에는 예수회 부속학교의 부학장으로 임명되는 등 강의를 하고 저술을 계속하게 됩니다. 우에스카 교구로 발령받은 후 그라시안의 강론에 감명받은 후원자의 지원으로 과거에 압수당했던 원고의 기억을 되살린 <계시와 처세술>이라는 책을 1647년에 출판합니다. <계시와 처세술>은 1658년 그가 죽기 전까지 계속 복원하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판은 <처세술>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그와 비슷한 제목의 수많은 번역서가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인간에 대한 통찰로 가득한 작품’이라고 극찬하며  독일어로 번역까지 했는데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도 있습니다. 쇼펜하우어 판은 영문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The Art of Worldly Wisdom>와 거의 같습니다. 까칠하기로 소문난 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번역까지 한 것을 보면 엄청난 감동을 받았나 봅니다.

     

수백 개의 잠언 혹은 아포리즘 aphorism으로 이루어진 그라시안의 조언은 하나하나가 진지한 토론의 주제가 될 만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읽으며 곱씹어보면 머리가 반짝하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오늘날의 자기 계발서 100권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이 한 권을 두고두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고 보는 쪽입니다. 모범 답안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하는 힘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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