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 비평
유가족들의 투쟁이 슬픔으로써의 투쟁이었기에 영화에서도 슬픔이 인물의 핵심 정동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슬픔을 강조하는 다른 영화들이 인물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돕는 것과는 달리 <생일>에서는 오열하는 순남과 정일을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이는 관객이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인물을 관찰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타인의 상처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도 네가 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겸손한 인정이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경험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상처를 모두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경험하지 않은 타자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고 나와 타자를 동일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상처 입은 타자에 대한 기만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에 대해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가능성을 닫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따라서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인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슬퍼하면서, 슬픔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가는 유가족들의 투쟁에 동참할 수 있다.
자극적인 편집을 사용하지 않고 순남과 정일의 슬픔을 겸손하게 지켜보는 <생일>의 시선은 낡은 언어의 홍수에 대한 저항이다. 낡은 언어를 거부하고, 새로운 언어를 찾을 때까지 고요하되 끈질기게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가 말했던 “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만들어 내는 정치적 활동”, 즉 본 영화의 ‘모랄(moral)’이다. 수호의 단짝인 상준은 수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인사는 안 할게. 그냥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말을 잠깐 멈추는 거야.” 우리의 투쟁은 말을 잠깐 멈추는 것이다. 세월호의 거대한 슬픔을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찾을 때까지 아이들에게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생일>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의 또 다른 특징은 슬픔의 원인이 되는 상실을 드러낼 때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고 시간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순남은 소파에 눕기 전에 베란다 밖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오는 것을 지켜봤던 습관을 가지고 있다. 순남은 수호를 잃은 후에도 여전히 수호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베란다 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서 힘겹게 소파에 누웠을 때 화면의 왼쪽에서 수호가 등장해 순남에게 농담을 건넨다. 이처럼 영화는 오버랩이나 디졸브 등 별도의 장치 없이 영화적 시간을 확장한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무는 시간의 확장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선형적 시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라깡은 현재를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래가 도래하며,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가 진보한다는 통념을 비판한다. 그는 인간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학습된 삶의 패턴을 반복한다면 시간은 무한한 굴레처럼 반복될 뿐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간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간, 정지된 시간, 즉 가짜 시간”이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미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플래시백을 사용하면 강력한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에 침입하여 이를 압도하게 된다. 과거의 시간이 특권적 위치에서 다른 모든 시간을 압도하게 되면, 미래의 시간도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그 이후에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시간이기에 영화에서는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고 시간을 확장한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과거의 반복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낡은 언어와 낡은 정의를 토대로 하는 기존의 삶을 반복한다면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시간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키는 플래시백 대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시간을 확장한다.
수호가 다시 사라진 후, 수호를 상징하는 센서등이 반짝이며 순남은 잠에서 깨어난다. 순남은 수호의 방으로 향하고, 수호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 이때 영화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순남이 사라진 벽을 비춘다. 순남이 수호에 대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장면에서 오히려 한동안 순남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이때 관객은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며 직접적으로 의미 교환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 인물의 감정을 생각하며 인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몸짓을 하고 있을지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음‘은 진실의 은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무수한 진실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고 관객은 스스로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낼 것을 제안받는다.
이는 또한 권력의 선명함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백상현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촛불>을 인용하며 “세계 이미지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란 오직 현재의 고정관념의 언어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의 선명함이란 권력의 선명함에 다름 아니기에” 초점이 맞지 않은 듯 흐릿한 그림으로 화가는 권력의 선명함에 저항했다고 설명한다. 리히터 그림 속의 촛불과 마찬가지로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은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포착될 수 없는 무수한 모습을 한 채 항상 우리 곁에 존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언제든지 소비하고 교환할 수 있는 것에만 너무 익숙해진 우리가 이들의 불분명한 슬픔을 보려 하지 않았기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는 순남의 얼굴을 한동안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선명하게 포착할 수 없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했던 무수한 모습의 슬픔을 관객 스스로 상상하고, 이러한 슬픔에 공감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때의 슬픔은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다. 이는 먼저 304명의 아이들을 잃어버렸다는 상실이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아이들의 삶을 되찾아 올 수 없기에, 우리의 상실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가 304명의 아이들과 함께 잃어버린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지탱했던, 혹은 지탱하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언어와 정의와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를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정의와 질서를 찾아 이를 토대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때까지 이 슬픔은 끝날 수 없다. 이 슬픔이 쉽게 봉합될 수 있고 치유될 것이라 단정하는 것, 끝없이 슬퍼하는 이들에게 “적당히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라”라고 말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초래했던 ‘적당한’ 정의, 낡은 정의에 굴복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참고 자료 :
신형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 출판, 2018, 28쪽.
위의 책, 28쪽.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34쪽.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 출판, 2018, 10쪽-11쪽.
박인영, 2017, ‘영화에서 플래시백을 통한 여성의 트라우마 재현’, 현대영화연구, 제13권 제2호, 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