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 비평
진은영은 바디우의 문장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만약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일 것인가? 내가 만약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 이 문장을 통해 우리는 어디로든 가고 무엇이든 되고 무엇인가를 말함으로써 우리가 가고 존재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계시해야 하는 용기를 요구받는다. (…) ‘우리가 갈 수 있다면’을 그저 하나의 불가능으로 남겨 두는 현실들, 즉 우리가 가고 존재하고 말하는 주체일지는 분명하지 않고 사실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이 현실의 틈새를 벌려서 ‘가고 존재하고 말할 수 있는’ 주체를 등록하고 명명하는 예술의 작업은 또 다른 방식의 시적 사건이 된다.”
우리가 어딘가로 갈 수 있고, 존재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당연한 믿음은 세월호 참사 이후 산산이 부서졌다. 참사 이후 우리의 삶은 미래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언어와 정의가 얼마나 낡고 초라한 것이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또 우리가 당연히 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정의’나 ‘가치’와 같은 단어들이 본래의 의미로부터 미끄러져 자리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거대한 상실과 슬픔 앞에서 갈 수도, 존재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가고 존재하고 말하는 토대로써의 ‘토포스’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상황. 자끄 데리다의 언어를 차용하자면 완전한 ‘불-가능’의 때에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는 순수한 ‘불-가능성’ 안에서 진정한 ‘가능성’을 마주하는 것이다. 진정한 ‘가능성’은 오직 순수한 ‘불-가능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예술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완전한 ‘불-가능성’의 틈새를 벌려 ‘말할 수 있는’ 존재를 등록한다. 그리고 우리는 용기를 내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계시해야 한다.
다시 바디우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내가 만약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분노와 슬픔 그 너머에 자리한 전혀 다른 무언가. 바로 ‘희망’이다.
참고자료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5쪽 -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