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먹고 싶어" 고등학교 동창친구와 몇 년만에 연락이 닿아 만나기로 한 날,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그리고 반가웠다. 나물 반찬이 점점 좋아지던 참이었다. 나물 향을 맡으며 밥을 먹는 일이 즐겁다. 과장하자면 광화문 한복판 식당 구석에 앉아 밥을 먹어도 자연 속에 있는 듯 상쾌하다. 소화도 잘 되고 입 안도 정화되는 것 같다. 특히 마스크 때문에 입냄새를 맡으며 호흡해야 하는 요즘에는 가능한 '깔끔한' 음식을 먹어야 여러모로 좋다.
한편 이제 30대에 접어든 나이인데,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새삼 느껴진다. 며칠 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라면, 떡볶이, 감자튀김을 하루 내리 먹었더니 다음날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까지 띵해서 컨디션 난조를 겪었다. 예전만큼 많이 먹기도 힘들다. 똑같이 먹어도 예전보다 살이 잘 붙는 것 같다. 50대에 들어선 선배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활동량이 줄어든거 아니냐", "예전보다 많이 먹는 거 아니냐"는 날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확실히 몸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2013년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 본 예능에서 난 인생조언을 만났었다. "인생을 처음 살아보는 거기 때문에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 그냥 사는거야. 조금 하는 거는 (나이가 들면서) 하나씩 뭘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여행 버라이어티 <꽃보다 누나> 에서 배우 윤여정 씨가 한 말이다. 먹고 싶은대로 다 먹지 못하는 것도 내려놓게 되는 것 중 하나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쉽지 않다. 자극적인 맛을 찾으며 따라가지도 못하는 내 소화능력을 시험하던 못된 버릇도 이젠 할 수 없게 돼버린 것 아닌가. 내려놓는 것이 날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인 것 같아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이가 드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다. 줄어드는 머리숱, 늘어나는 목주름처럼 가시적인 노화현상을 겪으면 조급함이 밀려온다. 머지 않아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포기해야 할까봐서. 사소하게는 내 옷장에 걸려있는 짧은 스커트랄까. 10년 뒤면 내 옷장을 모조리 뒤집어 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편안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20대에 거친 그 수많은 고민과 방황도 결국 모두 편안을 찾는 과정이었다. 조금씩 정리되는 삶을 살아낼 내 모습이 지금보다 더 단단해져 있을 것 같아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하다.
P.S 때때로는 늙어가는 내 모습에 서글픔을 느낄테다. 젊음을 그리워하며 탱탱한 볼살을 지닌 과거의 내 사진을 꺼내볼 지도 모른다. 그럴 땐 나물반찬을 천천히 씹으며 다시 오늘처럼 긍정의 힘을 채워넣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