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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Aug 03. 202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내가 이상한 걸까, 네가 이상한 걸까

사회 초년생 미생 때 이야기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나는 뭔가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입사 후 처음으로 하루 연차를 쓰고 싶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시스템 상으로 연차 신청 절차가 진행되었다. 컴퓨터에 휴가를 원하는 날짜를 입력하고 당시 다른 동료들이 하는 것처럼 사유에 ‘Personal Reason’을 적었다. 연차 신청을 완료하자마자 한국인 상사에게 메시지가 ‘띠링’하고 날라왔다. 


“어떤 개인적인 사유로 휴가를 신청하는 거예요?”


아…… 

그 사유가 지극히 개인적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서 꽤나 고심한 후, ‘Personal Reason’이라고 적은 거였는데…… 결국 그 개인적인 사유를 말해야만 휴가 승인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친하게 지내는 프랑스인 직장 동료 N에게 조언을 구하니, 깜짝 놀란다. 


“말도 안 돼! 개인적인 사유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것은 개념 없는 행동이야!! 그냥 개인적인 사유라고 끝까지 잡아 때!”


상대방이 너무 흥분을 하니 오히려 나의 감정이 차분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사의 반응이 크게 놀랍지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한국 회사였다면 상사의 이런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답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한국이었다면 휴가 사유에 ‘Personal Reason’이라고 적지도 않았을 것 같다. 아니, 한국이었다면 휴가를 시스템상에 제출하기 전에 상사에게 먼저 물어보았을 것이다. 

외국 회사라는 이유로 외국 동료들이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무작정 따라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한국인 상사의 시선으로 보니 오히려 내가 개념을 예쁘게 쌈싸 먹은 사회초년생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반 차를 쓸 때에도 상사에게 개인적으로 먼저 의견을 구했다. 조금이라도 긴 휴가를 쓸 때에는 온갖 구구절절 이유를 꾸며대며 휴가를 쓰는 요령도 터득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 내 상사가 (아마도) 아무렇지 않게 했던 그 질문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아주 큰 무례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배울 수 있었다.



한 번은 TV에서 유럽 어느 나라의 직장 생활 문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실험의 일환으로 한 직장인이 상사에게 여자친구와 헤어져 힘들어서 휴가를 쓰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러자 상사의 표정이 순간 ‘얼음’이 되는 모습이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당황한 상사의 표정에는 ‘아니 그런 개인적인 일을 왜 불편하게 갑자기 나한테 말하는 거지?’라는 내적 고민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외국에서 일하는 어느 분이 블로그에 쓴 글 중,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은 일화가 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거의 매일 같이 야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사에게 갑자기 면담 호출을 받았다. 상사는 그녀를 책상 앞에 앉혀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지금 주어진 일이 감당하기가 힘드냐고. 왜 그렇게 야근을 자꾸 하냐고.’


한국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개념’ 있는 행동이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개념’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한국에서 ‘NO’라며 투쟁했던 것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한다. 이쪽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보기도 하고, 저 쪽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내 모습만 우스꽝스러워질뿐이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쁜지는 따지고 싶지도 않고, 따진다 해도 정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직장 상사로부터 ‘개념이 있네 없네’ 욕을 한 바가지 먹었다면

오늘따라 왜인지 나 혼자 이상한 앨리스가 된 것 같을 때면 생각하자.

어쩌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지금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시계를 들고 다니는 토끼, 담배 피우는 애벌레, 사람 키보다 큰 버섯과 꽃들이 이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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