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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윤 Jul 19. 2024

죽음에 대하여

불효녀이기에 알 수 있었던 부모의 마음

 죽음에 대한 경험이 나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하면 너무 사치일까?     


 살면서 죽을 고비를 넘겨보지 않는 게 더한 축복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겪은 죽을 뻔한 고비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축복이다. 그렇다고 나의 죽을 고비가 엄청난 시련과 경험은 또 아니었지만,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죽음에 대한 나의 첫 사건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평소 책을 좋아했기에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방 안에 틀어박혀 주야장천 책만 읽었다.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서 엄마한테 미친년 소리를 처음 들었던 것 같다. 가끔 등짝 스매싱을 날리시긴 했어도 미친년 소리는 안 하셨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밥 먹을 때도 책을 놓지 않다가 떨어진 김칫국물에 꺼억꺼억 소리 내어 서럽게 울어댔으니 말이다. 사춘기 소녀 시절이니 그럴 법도 하다 싶기도 하지만, 정말 살짝 미쳐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햇빛 한 번 보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다가 친구와의 약속으로 시내에 있는 서점을 갔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 거구나 싶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또 책을 골라 읽고 있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약품 냄새 같은 것이 입에서 코로 넘어오는 듯했다. 몸의 중심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살려주세요'를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그저 내 안에 메아리만 되었다. 나는 분명 간절히 외쳤는데 말이 소리가 되지 못했다.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 기억은 영화필름처럼 나의 짧은 17년 인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생각했지만 그 행복한 파노라마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그 넓은 서점에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쓰러져 있었건만 발견되지 않고 혼자 깨어났다. 막상 깨어나고 나니 감사함보다 민망함이 먼저 밀려왔다. 사춘기 소녀다운 감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친구는 내가 안에 쓰러져 있는지도 모르고 서점 앞에서 마냥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그저 기다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친구를 만나서 조금 전의 일을 말했더니 당장 병원을 가야 한다며 끌고 갔다. 지금 생각해도 참 성숙했던 친구였다. 아차! 친구 이름도 성숙이었다.     


 그렇게 근처 내과에 갔다가 나이 지긋한 원장님한테 잔뜩 혼이 났다. 큰일 날 뻔했다면서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가 어딨냐며 어떻게 했길래 그랬냐고 추궁 아닌 추궁을 하셨다. 그간의 일을 이실직고했다가 동물원 가서 곰이랑 친구 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글로만 보면 의사 선생님이 너무 했나 싶겠지만 애정 어린 핀잔이었기에 넘길 수 있었다. 진료 끝나고 나가서 바로 시원한 오렌지주스를 한 잔 마시고 집에서 가서 밥도 잘 챙겨 먹으라고 하셨다.     


 고맙게도 나의 친구는 근처 빵집에 데려가서 나에게 오렌지주스를 사주었다. 같은 나이에도 여러모로 성숙했던 그 친구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로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그렇게까지 읽는 건 아니라고 언니처럼 선생님처럼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부모 말은 안 듣지만, 친구 말은 잘 들을 때라 그 뒤로는 가끔 햇빛도 보고 밥도 잘 챙겨 먹으며 여름방학을 보냈던 것 같다.   

  

 집에 와서 그날의 일을 복기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표현하기 애매한 복잡한 감정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가장 신기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짧은 순간에 나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는 것과 그것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만이 보였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죽음이라는 게 뭔지 모를 때였지만 문득 드는 생각이 사람이 죽을 때는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추억하면서 죽는 건가 보다 싶었다.   

   

 이건 나에게 엄청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삶에 대한 방향을 완전히 바뀌게 하는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삶, 내가 기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행복하고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면 이것도 내가 죽을 때 기억이 나려나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날은 이건 분명 죽을 때 기억이 날 거야 라면서 해맑게 행복해해서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다.    

  

 여하튼 나는 아직도 17살 때의 추억? 기억?으로 즐거운 일을 많이 하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생이 그렇게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지만 그 안에서 나만의 기쁨을 찾아보려 애쓰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이런 삶의 지혜를 얻은 게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스러운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경험해 본 걸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죽음을 경험한 것은 35살 즈음이었다. 늦깎이 대학생 시절이었는데 동기생들과 학창 시절을 즐겁게 보내던 때였다. 사건의 시작이었던 그날 1박 2일로 화개장터를 놀러 갔었다. 장터를 신나게 누비며 구경하다가 튀긴 은어를 시식하라는 말에 냉큼 집어 먹었다. 워낙에 생선을 좋아했고 은어 튀김은 추억이 있던 음식이라 신나게 먹었다. 그런데 그 튀김이 원인이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일행 4명 중 나만 그 은어 튀김을 먹었고 얼마 후에 나는 A형 간염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매일 쌓여가는 피로에 그저 내가 나이 들어 학교생활하느라 힘든가 보다 했다. 주변에서도 낯빛이 안 좋으니 병원 가봐라 해도 그저 피곤함이나 감기 몸살 정도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이 노랗게 변한 걸 본 엄마가 병원에 가자고 하셔서 핑계 김에 따라나섰다.    

 

 그곳 병원 원장님한테도 엄청 혼이 났다. 이렇게 될 때까지 참는 사람이 어딨냐며 당장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하셨다. 직접 전화도 해주셨던 것 같다. 응급실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병실로 옮겼을 때였다. 담당의가 갑자기 엄마를 밖으로 부르셨다. 뭔가 심각한가 보다 싶기는 했다. 잠시 후 엄마의 눈시울이 벌게져서 돌아오셨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기우나 호들갑 정도로 여겼다.  

   

 엄마는 한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울구불구하며 간간히 여기저기 급하게 전화를 하셨다. 그런데 잠시 후 타지에서 직장 생활하던 남편과 동생들이 몇 시간 사이로 모여들었다. 다들 심란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서는 밖에 나가 한참을 있다가 다시 들어왔다가를 저녁이 다 되도록 반복했다. 어릴 적 아플 때도 병문안을 잘 안 오시던 아버지도 그날만은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이건 눈치를 안 채려야 안 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 내가 죽는가 보구나 싶었다. 그런데 차마 가족들이 말은 못 하고 죽기 전에 얼굴 보러 온 것이었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너무 오래 참고 늦게 와서 간 염증 수치가 떨어지질 않고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약을 써 보지만 그날 밤이 고비여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나 보다.      


 이렇게 살아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럼 솔직하게 말하고 유언을 남길 시간을 줬어야 하는 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미 눈치를 챈 나는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자꾸만 졸음이 밀려와 자다 깨다 했던 것 같다. 이러다 밤사이 자다가 죽으면 아프지 않게 죽으니 차라리 다행이겠다 싶은 생각도 했다.      


 그러다 문득 죽음을 앞두고 부모가 걱정되었다. 효녀여서가 아니었다. 불효녀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마음이었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부모를 떠나보내는 마음보다 더 큰 아픔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식보다는 부모가 더 걱정이 되었다. 이후로 나는 부모 말을 더 잘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모가 기뻐할 일들을 했다. 그건 내 자식들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들이었다. 바로 건강하고 스스로의 삶을 잘 살아가며 자신만의 성공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거였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나를 성장시킨 것이다.   

  

 이러니 감히 나는 죽음에 대한 경험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소 해프닝으로 끝난 경험들이었지만 그 결과물은 창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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