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꾼 송 여인의 기막힌 인생 2부]
여인은 중국에서 사무치는 외로움을 경험해야 한다. 하지만 돈을 버는 재미로 외로움을 달래기 시작했다. 한 푼, 두 푼 쌓이는 돈에 재미를 들이고 돈 액수가 많아지면 국경지역의 브로커들을 불러 가족에게 돈을 보내곤 했다. 북한에서 사는 가족에게 여인은 경제적인 발판이나 다름없었다. 여인이 돈을 보내주는 덕분에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호강하며 잘 버텨 나갈 수 있었다. 몇 차례 돈을 보내주던 여인은 가족을 전부 탈북시켜 함께 모여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녀는 먼저 딸 승희를 탈북시켜 한국으로 보낼 결심을 했다. 승희는 그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었다. 여인은 끝내 딸을 중국으로 불러냈고 딸을 먼저 한국으로 떠나 보냈다. 한시름을 던 것 같았다. 이제는 남편과 아들만 탈북시켜 한국으로 데리고 가면 온 가족이 모여 마음 편히 살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졌다.
매일 고되게 일해야만 하는 식당일이 때로 버겁게 느껴졌지만 가족을 떠올리며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송 여인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송 여인은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인이 있는 곳은 촌마을이라 탈북해 온 북한 사람들도 없었고 중국 공안(公安)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공안이 나타나 시비를 걸어온 것이었다. 공안은 증명서를 보자며 특별히 송 여인에게만 다가왔다. 송 여인은 자기는 조선족이며 어디에 살고 있으니, 증명서를 가지러 갔다가 오겠다고 늘 머릿속에 준비해놓은 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통할리 없었다. 탈북자가 있다는 제보를 이미 받았던 것이다. 여인은 그제야 하루 전에 식당에 와서 씨까불던(놀려대던) 망종 같은 남자가 생각났다. 식당에 가끔씩 들러 술도 마시고 왕창 떠들고 가는, 행동이 변변치 못한 남자였다.
“어, 아줌마, 남편 없이 혼자 산다며? 나랑 살지 않을래? 나 생긴 건 못 생겨도 아줌마 하나는 잘 챙겨줄 자신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을 건드려보고 지나가는 남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인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그 남자의 손이 몸에 자꾸 와서 닿는 통에 화가 나서 북한 사투리로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투가 이상하다며 “어디서 왔어?” 하고 따져 물었다. 여인은 화가 난 김에 또 소리를 냅다 질렀다. 양도 거칠게 굴면 사나워 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 어디에서 왔음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나 통화(중국 지린성 지명)에서 왔소.” 여인은 조선족 말투를 흉내내 소리를 질러댔다. “어허, 말투가 이상하메. 여기 조선족말투가 아니네. 아주마이, 북한에서 왔소? 북한마누라들 맵짠(매서운) 냄새가 나네.” 그제야 여인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며 살아왔는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술 먹은 남자가 괜한 억지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일하러 나왔는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고발을 받은 중국 공안은 여인을 무작정 끌어 감옥에 처넣었다. 여인은 결국 북송되었다.
북송 이후 혜산 보위부에 갇힌 여인은 얼굴이 꺼멓게 죽어 있었다. 총 사건에 연루되어 보위부에 갇혔다도망쳐 탈북한 여인을 보위부가 살려둘리 없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더는 살아날 길이 없다고 장담했다.감옥 안은 탈북했다가 북송되어온 수많은 여인들로 악마구리 끓듯(무질서하고 소란)했다. 앉을 자리도 없어 겨우 비집고 앉아야 했다. 감옥 안은 앉자마자 이 잡이를 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목욕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며칠씩 있다보니 머리에 서캐가 하얗게 끼고 몸에서는 이가 기어다녔다. 여인들이 서로 둘러앉아 이 잡이를 하고 있었다. 변기도 얼굴과 마주할 정도로 가까워서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처음에는 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조금 후에는 중독되었다. 몸과 몸을 겹친 채로 앉아야 하고 밤에는 돌아 누울 자리도 없어 구부린 채 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여인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첫 질문이 “왜 탈북했는가?”였다. 여인은 자기가 탈북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나는 칼에 찔려 죽은 보위원의 권총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보위부에 잡혀가서 죽을까봐 중국으로 도망쳤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자신은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더 무서운 곳으로 가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의 얼굴도 영영 못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그 시라소니같은 중국 놈하고 엇섰다(맞섰다)는 후회만 들었다. 심문이 끝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후 며칠간 아무도 찾지 않았다. 다른 북송자들은 매일 불러내 실컷 얻어 맞고 터지고 하는데 여인에 대해서는 감감 잊어버린 듯 했다. 여인은 그게 더 걱정 스러웠다. ‘혹시나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보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감옥 안 누군가가 자기들같이 배가 고파서 중국으로 건너간 북송자들은 3, 4년 형을 살면 그만이지만 정치적으로 다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한동안 불러내지도 않고 있다가 정치범수용소 같은 곳에 아무도 모르게 보내진다고 말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매일 아침 보위원들이 북송자들의 이름을 불러 내보낼 때마다 행여라도 내 이름이 불리지 않을까 간절히 빌었다. 그 날 아침도 보위원이 여느때처럼 북송자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은 없겠거니 하고 포기하려는 찰나, 맨 마지막에 여인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보위원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다른 북송자들을 찾을 때와 달리 목소리가 은은하다. 얼굴에 미소를 띤 보위원이 공손한 모습으로 송 여인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이상해 보였다. 이후 보위원의 말이 송 여인을 더 놀라게 했다.
“아주머니, 정말 고생했소. 다행이요. 애매하게 걸려들어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요. 그곳 보위부에 조사를 요청했더니 어제 저녁에 답장이 왔소. 아주머니를 잘 보호해주라는 지시가 내려왔소.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함북도 보위부에서 사람이 데리러 올거요.”
송 여인은 뒤로 벌렁 나가 자빠질 뻔 했다. 적대감 같은 것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호랑이 같은 보위부가 알아줄 때도 있구나, 이럴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동의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정말 고맙습네다. 고맙습네다.”
그렇게 심문이 끝났다. 송 여인이 들어오자 감옥소 측에서는 다른 죄인과 구별되는 깨끗하게 꾸린 독방도 따로 내주었다. 그 방은 감옥에서는 호화롭다고 해야 할 정도로 이부자리가 깨끗했고 혼자 있기에는 적적하다고 할 정도로 크고 편한 곳이었다. 내의도 새것으로 넣어주었다. 송 여인에 대한 관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 세끼 식사를 무엇으로 먹겠는가 물어보는가 하면, 좋은 음식과 간식도 가져다주었다. 보위원들은 항상 좋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매일 와서 불편한 것은 없는 지 물어보기도 했다. 송 여인은 황송하기만 했다.
그렇게 보름 정도 머물고 난 후 고향 보위부에서 사람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데리러 왔다. 여인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승용차를 타 봤다. 중국에서는 매일이다시피 타는 승용차가 북한에서는 그림의 떡과 같았다. 함북도 보위부까지 오는 동안 데리러 온 보위원들도 살갑게 대해주었다. 점심시간에는 일반 사람들이 흔하게 가지 못하는 단고기(개고기) 식당에 들러 대접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고향이 있는 도 보위부에 들어섰다. 보위부에 들어서자 여인은 또 가슴이 섬찍했다. 여인에 대한 모든 조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죄수들이 들어가는 방은 아니고 일반인들이 있을 수 있는 아늑한 방에서 며칠을 지내야 했다. 그것도 보위부 안에 있는 방이어서 뭔가 연극을 꾸미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다 열흘간 그 방에 머물며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숨의 은인인 보위원을 다시 만나
보위부는 끝내 총을 찾지 못했다 송 여인이 달아나자 감시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담당보위원은 다음날로 정복을 벗고 쫓겨나 수산사업소 노동자로 강직됐다. 총은 훗날 우연 중에 나타났다. 압록강의 국경연선에서 권총을 가지고 남조선(한국)으로 내빼려던 놈을 잡았던 것이다. 놈은 간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총 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제야 여인은 한 시름을 놓았다. 보위부는 결국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했고 여인은 보름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 6년 만에 고향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복을 벗고 수산사업소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전 담당보위원을 만났다. 그가 아니면 송 여인은 이슬도 없이 사라질 뻔 했다.
“잘 지냈소? 허허허.”
담당보위원이었던 그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푸접(붙임성)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사실 그때 내가 송 아줌마 도망가라고 일부러 일러준 거였소. 영특하게 살아가는 아줌마이니 그 정도로 말을 하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복을 벗고 보니 시름을 던 것 같았소. 이렇게 살아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롭소.”
보위원은 맑은 웃음을 짓고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정말 고맙수. 보위원동지가 아니라면 지금쯤 죽었을 지도 모르지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여인은 눈물이 글썽해서 마주보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이었다. 보위원은 그제야 그 사건에 연루자로 보위부에 잡혀 고문 끝에 살아 돌아오지 못한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송 아줌마가 감옥 안에 들어온 날 밤에 다른 한 사람도 범인으로 지목되어 보위부에 잡혀왔소. 화학공장 부문 당 비서(위원장)였는데 애매하게 걸려들었소. 죽은 보위원과 며칠 전에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연루자가 되었소. 취조 중에 감옥 안에서 옥사당하고 말았소.”
듣는 것 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그 사람은 죽은 반탐과 보위원이 담당한 공장 부문 당 비서였다. 문젯거리가 생겨 보위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눈치를 채고 보위원에게 무슨 죄가 있어 감시하느냐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부문 당 비서는 상급 당 조직에 불려가 비판서를 쓰는 중이었고 그 과정에 보위원이 죽은 것이었다. 결국 죽은 보위원과 원한 사이라는 죄목에 해당되어 잡혀갔다. 보위원이 죽은 날 그 사람은 공장에 있었고, 모든 것이 증명이 되었지만 보위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잡아들였다. 그 사람은 보위부의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감옥 안에서 옥사 당했다.
이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사람이 받은 첫 고문은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앉는 고문이었다고 한다. 두 무릎 안에 두꺼운 나무각목을 넣고 꿇어 앉게 하는 고통스러운 고문이었다. 각목을 깔고 앉은 두 다리는 10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고문을 매일같이 견뎌내야 했고 그들이 물어보는 질문에 맞는 답이 나오지 않자 매일같이 나무각자로 두들겨 맞았다. 그 고통을 무슨 말로 다 하랴… 훗날 고문을 담당했던 보위원이 자기 스스로도 참혹해서 그 참상에 대해 몰래 친구들에게 털어놨다. 그 사람은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고 끝까지 우겼지만 백열등을 켠 1평방짜리 지하 감방 안에서 참혹하게 숨졌다.
고향에 다시 왔지만 여인은 중국에서 살 때보다 삶의 희열 같은 것이 점점 사라져갔다. 남의 땅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불안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중국에서는 사람 사는 맛이 느껴졌다. 내 힘 닿는 만큼 실컷 돈을 벌고 힘들면 노래방에 가서 한국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공안을 빼 놓고는 누가 찾는 사람이 없어 다른 걱정 같은 것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다시 고향에 오니 탈북자 대접이 만만치 않았다. 또 달아날까봐 항시 감시가 뒤따르는 것은 물론 인민반 동원에 등쌀이 휠 것 같았다. 새로 담당한 보위원은 매일이다시피 집에 찾아와 여인이 어디로 가지 않는지 동정을 살폈다. 살기가 싫어졌다. 또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사건은 이렇게 끝났다. 보위원에게 밥 한 그릇 먹여주고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여인, 그 이후 여인의 소식은 잘 모른다. 굳세게 살아가는 여인이라 지금도 모든 것을 잘 이겨내고 버텨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여인의 앞길에 더는 벼랑턱 같은 가시 길이 없어지고 행운만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끝)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