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글/사진] [제주 이야기]
허름한 보물상자 - 카페닐스
돌담을 따라 금능리를 걷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게 된 곳이 있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커다란 나무가 있는 작고 오래된 집이었다. 급히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누르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입구로 다가가자 목줄을 한 까만 개 한 마리가 내게 다가온다. 집을 지키듯 서 있는 모양새가 퍽 귀여워 넣었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돌담에 문패처럼 달아놓은 작은 간판은 이곳이 ‘카페닐스’임을 알려준다.
고명이라 불리는 까만 개는 주인이 카페를 시작할 무렵 제주시 보호소에서 데려왔다고 한다. 올해로 3살이 된 고명이는 카페 앞을 지키고 서서 열심히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다. 고명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선 카페에는 갖가지 소품이 가득하다. 책과 잡동사니를 늘어놓은 선반을 보니 어쩐지 내방 같은 친숙함이 느껴진다.
선반에 놓인 돌을 만지작대고 있으니 언젠가 가족과 함께 갔던 해수욕장이 떠오른다. 몽돌이 깔린 해변을 신기한 듯 돌아다니던 나는 예쁘게 생긴 돌을 골라 주머니에 넣어오곤 했다. 자그맣고 매끈하게 빛나던 그 돌은 방에 숨겨둔 나만의 보물 상자 안에 여전히 담겨있다. 보물 상자 안에는 친구에게 받은 쪽지를 비롯해 오빠 방에서 훔친 구슬, 색종이 안에 들어있던 스티커, 중학교 때 달았던 명찰, 심지어는 담임선생님 사인이 담긴 조퇴 확인서까지 들어있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은 잡동사니에 불가할지라도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물건들이다. 아기자기한 물건이 가득 한 ‘카페닐스’는 마치 좋아하는 것을 모아놓은 사장님만의 보물창고 같다.
인테리어는 전부 직접 하신 건가요?
여기가 정말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이었어요. 그걸 제가 빌린지라 많이 손댈 순 없고요. 직접 꾸미긴 했는데 인테리어라고 할 만한 건 없어요.
꾸민 게 별로 없다는 사장님의 말과는 달리 카페 안은 구석구석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사장님은 이 집을 비싸게 주고 샀다면 더 멋진 인테리어를 선보였을 거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공간을 공간 자체로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인테리어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제가 주워온 거예요.
카페 안을 빈틈없이 채운 소품은 사장님이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하나씩 주워온 물건들이다. 창가에 놓인 그릇 조각은 근처 해변에서, 책상 위 나뭇가지는 마을 길가에서 가져왔다. 연주는 잘하지 못하지만, 집에 있는 우쿨렐레도 갖다 놓고, 예쁜 엽서나 작은 장난감도 선반에 진열해놓았다. 꼭 지금같이 맑았던 지난 가을날, 길에 떨어진 감나무 가지를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주워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쓸데없는 걸 주워온다고 항상 혼나기만 하던 나에게 이곳은 천국과도 같다.
카페에는 비단 사장님의 손길만이 닿아있는 것은 아니다. 벽에 빼곡히 붙은 그림과 쪽지는 모두 손님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동네 아이들이 서툴지만 고명이를 그린 그림도 있고, 전문가의 손길로 그려낸 듯한 그림도 있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기둥에는 손님이 주고 갔다는 수공예품인 마크라메까지 걸려 있다. 이곳에 들른 손님들은 자신의 흔적을 카페에 남기는 것으로 공간과 소통한다. 아무도 못 보게 내방 한구석에 숨겨둔 보물 상자와 달리 카페닐스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보물창고다.
카페를 나오는 길, 수호신처럼 우직하게 서 있는 50년 된 돈나무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를 주워들었다. 카페에 추억을 남기고 돌아서는 대신 나름의 추억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어서였다. 카페닐스의 포근함을 담은 돈나무 잎은 그렇게 내 보물 상자의 새 식구가 되었다. 비록 제주를 떠나왔지만 언제나 푸른 돈나무 잎처럼 카페닐스의 추억은 내 마음속에 여전히 푸르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