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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 Jan 18. 2021

[여행기] 소처럼 우직한 우보의 밥상
- 우보설렁탕

[취재/글/사진] [조치원 이야기]


소처럼 우직한 우보의 밥상 - 우보설렁탕




따스한 가을 햇볕에 한쪽으로 벗어두었던 코트가 무색하게도 추위는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찾아왔다. 이렇게 갑자기 쌀쌀해지는 날이면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진다. 특히 환절기가 찾아올 때면 엄마가 항상 해주시던 곰탕의 뽀얀 국물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이면 얼었던 몸이 순식간에 따뜻하게 녹아들곤 했다. 뜨끈한 국물을 그릇째 들고 마시는 나를 보고 천천히 먹으라 타이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매서운 바람을 피해 차가워진 몸을 녹이러 들어간 조치원의 한 설렁탕집. 넝쿨이 간판을 뒤덮어 ‘설렁’이라는 글자밖에 보이지 않지만, 단골이 대부분인 식당은 가려진 간판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설렁탕집은 입구부터 골동품이 가득한데, 그 사이로 연예인의 사인이 한가득 벽에 걸려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인도 사장님에게는 골동품과 다르지 않은 듯 그저 빈 곳을 찾아 붙여놓은 것이 전부였다. 



가게 안은 입구보다 더 많은 골동품으로 가득하다. 오래된 물건이 빼곡한 식당 안은 정겨운 향토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수집품에 시선을 뺏겨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주인이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사장님이 전부 모으신 거예요.



우보설렁탕은 사장님 대신 사위가 대를 이어 운영한다.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사장님은 물건 한 점 한 점을 전부 자식처럼 여긴다고 한다. 모은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런 사장님의 감성적인 면모는 식당 정중앙 벽에 걸려있는 액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액자 속 내용은 ‘우보’라는 제목으로 지은 사장님의 자작시이다. 



우보(牛步)

닷새 장 십리가 넘는 장벌 서산에 해 진지 오래 
걸죽한 탁주 몇잔에 진작 취하신 아버지 달구지 위에 누워 주무셔도 
믿음직한 우보는 혼자서 돌아옵니다 큰눈망울 꿈먹이며 소방울 떨렁이며 
미루나무 늘 서있는 저문 신작로를
- 임오동지날 운곡


아련한 어린 날의 추억을 배경으로 지은 시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식당의 이름이기도 한 ‘우보(牛步)’는 사장님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소처럼 순박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하며 살자는 뜻이다. 사장님은 그 이름처럼 우직하게 20년이 넘도록 조치원에서 설렁탕 장사를 해왔다. 



주문한 설렁탕은 식당 안을 둘러보던 나를 자리에 앉히기 충분했다. 뜨거운 뚝배기에 담아서 나온 설렁탕은 헛기침이 나올 정도로 뜨끈했다. 시원하면서도 담백한 국물과 푸짐한 고기 건더기가 조화를 이룬 설렁탕에는 건강함이 가득 담겨있다. 저염식으로 조리된 음식들은 식사가 끝난 후에도 속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손님이 없어 고요한 식당 안에는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온다.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며 느긋하게 밥을 먹고 있으니 학창시절 등교하기 전 집안 풍경이 떠오른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의 손길과 각자 출근 시간, 등교 시간이 달라 따로 밥을 먹고 나가던 가족들. 그때처럼 숟가락을 입에 물고 졸고 있으면 어디선가 엄마가 나타나 등짝을 내려칠 것만 같다. 창문으로 잔잔하게 들어오는 햇살 때문일까. 어느새 이곳이 식당이란 사실도 잊고 편안한 분위기에 한동안 취해 있었다.



느리지만 꾸준한 소걸음처럼


설렁탕 한 그릇에 든든해진 몸을 안고 식당을 나서는 길, 따뜻해진 마음만큼 발걸음도 한결 여유로워진다. 오랜 시간 뭉근히 끓여내는 설렁탕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걷는 소의 걸음이 연상된다. 논어에 나오는 ‘우보천리 마보십리’라는 말처럼 빠르지만 십리 길에 지치고 마는 말보다는, 느리지만 천천히 천릿길을 가는 소의 걸음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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