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D 문화 브로셔 Sep 21. 2022

멀홀랜드 드라이브

영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부조리와 줄다리기

BBC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영화에서 1위로 선정된 영화다. 그만큼 영화적으로 크게 인정을 받은 영화라 하겠다. 감독은 데이비드 린치로 난해하고 예술적인 영화를 만드는 유명한 감독이다.

이 영화는 우선 내러티브에 있어서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고, 감독 또한 스스로 명확한 해석을 내놓지 않아, 내러티브의 해석에 대부분 관심을 갖고 살펴볼만한 영화다. 그만큼 영화 해석에 있어서 숨겨진 의미에 대한 숨은 그림 찾기처럼 뜻을 찾아내는듯한 해석들이 난무한다. 사실 그런 해석류들을 보면 유치하다는 생각을 버리긴 어렵다. 어디까지가 누구의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에 대해서 전체 내러티브의 일관성을 맞추어내기 위한 해석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해석이란 것이 어찌 그런 난제 풀기와 같은 것이겠는가. 정해진 답을 비비 꼬은 문제 속에서 찾아내기 훈련을 성인이 되기까지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해온 결과이리라. 해석은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법이다. 감독이 숨겨놓은 의미 찾기 식의 놀이는 80년대에나 즐길만한 전통놀이의 촌스러움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를 평한다는 것은 만들어져있는 의미를 찾아내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서 의미를 생성해내는 일이다. 평하는 곳에서는 제 2의 창작 활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작품을 글로써 만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파편들이 짜깁기된 퀼트를 가지고 어떠한 형상이 보인다고 한들 어차피 게스탈트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저 보는 사람이 임의로 생성하는 구성된 이미지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 어떻게 만들어내든 정답과는 관계 없으며, 짜맞추는 재미를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보아야할 것은 바로 그러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현상이다. 그런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조각들을 어떻게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결하려고 하는 인간 정신의 본성 말이다. 세계와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만나고 그 만남의 지점에서 어떠한 행위들이 나타나는가를 보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세계를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은 꿈처럼 파편적으로 의미가 분해되어 있고 결코 합리적으로 완결되고 정합적인 것이 아니다. 영화와 같은 픽션이 짜임새가 있고 합리적 정합성을 갖는 것은 현실이 그 반대로 비합리적이고 파편적임을 가리는 것이다. 이 영화에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은 완전히 파편적으로 해체시켜놓지 않고 마치 온전하게 정합적으로 구성된 내러티브가 있는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사실은 아무런 내러티브도 아무런 로고스도 없으면서 마치 뭔가 온전하고 정합적인 이성적 세계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과 같다. 이 영화의 의미는 영화 자체의 물성에 있기보다 영화가 관람되면서 발생하는 그 사이에 존재한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 발생하는 부조리가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이다. 영화라는 비합리의 세계에 관객이라는 인간 정신의 이성적 합리성이 부딪혀있는 부조리를 말하는 것이다. 부조리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이미 있지만 이 영화는 좀 더 교묘하게 그러한 부조리극을 만들어냈다. 부조리극이 아닌듯 관객을 속이고 유혹하는 셈이다.     


부조리에 대해서 주로 말한 철학자는 까뮈이다.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세계의 불합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만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까뮈도 스스로의 글에서 그렇게 이해하지 말라고 강조하는데도 그런 식의 이해가 많다. 부조리는 인간의 합리에 대한 추구와 세계의 불합리함이 만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까뮈는 이렇게 단적으로 부조리를 정리하는 것이 싫었기에 이런저런 다른 정의를 계속 반복해서 지겹게 얘기하기는 하지만 암튼 그렇다. 이점에서 까뮈가 왜 그렇게까지 인간의 합리에 대한 욕구를 인간 정신의 본질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좀 더 따져봐야할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까뮈는 인간의 합리성과 세계의 비합리성을 대조해놓고 그 관계를 부조리라고 말했다.


세계라고 말하면 너무 추상적이니 바로 이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세계라는 위치에 대치해보자. 이 영화는 매우 비합리적이다. 등장인물이 영화 전체를 통해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스토리 또한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전혀 다른 인물들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을 연결시킨 끈은 단순히 동일한 배우가 나온다는 것 뿐이다. 동일한 배우가 동일한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기존 영화의 법칙이었으니 그것에 맞추어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선입견일 뿐 앞과 뒤가 전혀 다른 영화 2개를 붙여놓았다고 한들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다름에 대해서 하나는 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한 영화 내에서는 동일한 배우가 동일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명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드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로고스가 있다. 그 로고스에 아무런 논리와 정합성이 없는 세계를 나름대로 짜맞추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맞추어가는데 한계가 있으며, 세계가 그렇게 자신의 로고스대로 흘러가지 않음에 분노하게 된다. 까뮈는 그런 상황에서 부조리에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는 반항과 열정을 가지고 그저 열심히 살아가라고만 한다. 그러한 세계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고 긍정하는 철학은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니체는 그러한 세계의 현실을 긍정하고 극복하는 아모르 파티를 이야기했고, 까뮈는 부조리를 긍정하고 부조리 속에서 그저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나와 세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의 간극은 여전하다. 그러한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열심히 살던가 극복을 하던가 어찌 하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야만 한다. 삶은 계속 되어야 하고, 삶은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살아 숨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대부업자 소울앤캐시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