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2개월, 이번에 시아버지가 혼자 독일에 오셨다. 브라질에서 슬퍼하는 것보다 독일에 와서 바람 좀 쐬는 게 어떻겠느냐는 아들의 제안에 응했다. 시아버지가 오시기 전, 남편은 누나에게서 이틀 정도 하루 종일 외출하는 날이 있고, 그럴 때면 아버지가 걱정된다는 말을 들었다. 덩달아 아버지 걱정을 시작했고, 자기 시간도 없는 그가 일주일에 한번씩 아버지와 한 시간 이상 통화하곤 했다. 워낙, 가족에 대해 예민하고 걱정을 많이 하는 남편이라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만, 걱정도 전화도 안 하고 사는 나와 비교가 많이 된다.
시아버지가 우리 집에 도착하자 창문을 열어 환하게 웃었다. 만나자마자 평소보다 길게 안아드렸다. 그 몇 초 더 길어진 포옹에 시아버지는 놀란 듯 했다. 그만큼 그는 예민한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한국에 가기 전까지 나와 시아버지는 아무 문제없이 잘 지냈다. 아이들과 같이 전자 기기를 보러 가기도 하고, 산책도 가고. 술을 마시며 대화 하고. 둘째의 생일 파티도 했다. 그는 야구를 해보기도 하고, 생일 파티를 도와줬다.
한 번의 문제가 생일 파티 때 터졌다. 파티에 열 한 명의 아이들을 초대했다. 저녁에 그릴을 하려고 준비하는 중, 아이들이 작대기 하나씩 들고 와서 불 근처에서 알짱거렸다. 마로니에를 던지고, 불이 붙은 막대기를 들고 돌기도 하고, 약간 위험하고 소란스러웠다. 나와 남편은 그런 아이들을 풀어놓았다. 나는 그런 상태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남편도 괜찮은 듯 보였는데, 갑자기 시아버지가 “조용히 해!”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모닥불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화가 나면 종종 소리를 지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남의 집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아이들을 컨트롤하는 게 우리 몫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한계를 설정해야한다고, 그 이상은 않된다고 가르쳐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알 때까지 좀 두고 보는 스타일이다. 그런 내 교육 방침을 잘 모르는 다른 부모들이나 시아버지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놀아난다고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한국에서 돌아오기 전, 남편과 전화통화할 때, 남편은 시아버지가 불평을 많이 한다고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아이들이 물건을 바닥에 늘어놓고 치우지 않는다고, 일을 하면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 걸 두고보지 못하는 그가, 한 번 내게 화를 낸 적도 있다.
문제는 내가 한국에서 돌아오고 나서다. 그도 독일에 온지 좀 됐고(신선한 기분이 오래되면 무덤덤해진다), 나도 한국 여행으로 무뎌진 독일어때문에 잘 안 들리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또 이 나라보다 내 나라에서의 그 편리하고 기를 편 상태가 그리워서 뭔가 복잡한 심정이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시아버지에게 즐겁게 말했다. 그리고 나선 할 말이 없었다. 몇 가지 대화에서 잘 못 알아듣고, 엉뚱한 반응을 했더니 그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그후로 반응이 더욱 줄어들었다. 그 후로 그가 하는 말 중에 제일 잘 들리는 것은 그의 불평들이었다. 독일에는 새가 없다느니. 남편이 시아버지에게 수영장 이용권을 선물했는데, 수영장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고 싶지 않다느니. 또 가족 여행 계획을 하려고 하는데, 벌써부터 그걸 왜 하느니. 자기는 이제 어디가서 뭘 구경하는 게 싫다느니. 아, 참 세상에 싫은 것도 참 많다. 라는 생각이 들자. 더이상 뭔가 함께 하자고 권하지를 못하겠다.
시어머니가 안 계시니, 시아버지의 성격이 더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예민하고, 여행을 그리 좋아하시지 않고, (의외로) 깨끗한 환경을 좋아하시며, 조용하고 조용한 자기만의 시간을 선호하신다는 걸. 다 좋다. 그를 존중하려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시아버지가 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줄 모른다는 것이다. 나도 내 아이들과 어쩔 때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기는 한다. 어려운 일인 줄 알면서 그걸 기대하는 내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 점점 분명해지는 건, 이 두 세대가 시간을 보내는 게 아주 어렵다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희생하지 않는 한. 그 둘은 어울릴 수 없는.. 사이.
시아버지가 브라질에 돌아가시고 나자, 남편은 우울해했다. 시아버지가 식사할 때 둘째가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음식을 씹지도 않고 넘긴다느니. 못 마땅했다는 거다. 그런 표정을 다 지켜봤던구나. 남편도 참, 예민하지만. 시아버지도 그런 표정을 좀 감추시지. 나는 내 아이들이 그렇게 즐겁게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는데, 시아버지는 그런 가족과 갖는 시간에 그걸 느끼지 못한 게 참 아쉬울 뿐이다.
시아버지가 독일에 계시는 동안, 좀 더 밝은 걸 보고 가셨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는 분이 아니신가. 안타까워졌다. 나이가 들면, 바꾸기 힘들다. 남편처럼 그렇게 우울해할 게 아니라, 그런 불평 불만을 아예 못 알아듣는 내가 더 행복한 것 같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두는 털털한 기질이 다행이다. 내가 나이가 든다면,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좀 더 좋은 것을 보고 칭찬하고 또 찬양하며 살아가고 싶다. 언젠가, 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한참 보고 있었다. 그때 웅덩이의 구정물이 보였다. 구정물을 볼 것인가. 웅덩이 위에 비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볼 것인가. 그것은 나의 선택에 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