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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애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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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희비극 Sep 20. 2021

#17

  조금씩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제일 먼저 현아언니에게로 갔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뭉이를 안고 가게를 지키던 언니가 따뜻한 차와 안쪽 자리를 내주었다. 그곳에 앉아 언니와 함께 손님들을 맞이했다. 오는 사람마다 조금 놀란 기색으로 진선 씨, 하고 반겨주었다. 그중엔 하레 아빠 준영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준영도 사고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주먹을 내미는 준영과 가볍게 주먹 인사를 나누고 하레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잘 지냈어요? 물으며 마주 앉던 준영이 갑자기 눈물을 보였다. “준영 씨가 왜 울어?”하며 현아언니가 휴지를 건넸다. 준영은 양파를 까다 왔다며 태연하게 눈물을 닦아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흐흐 웃었다.


  언젠가 현아 언니네서 술을 마시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규원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진선 언니 처음 만났을 땐 그냥 개 산책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규원은 나의 졸업과 출간을 유쾌하게 칭찬해 준 것이다. 동네 백수인 줄로만 알았는데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말을 이었으니까. 나는 그 표현이 퍽 맘에 들었다. 소속이 없었으니 나를 제일 잘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고, 한편으로 나를 거창하게 포장한 것 같기도 했다. 이진선은 복이와 산책하는 사람. 그건 정말이지 근사한 말이었다.


  그런데 준영을 보면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준영은 개 산책하는 사람이지. 하레와 산책하는 사람이지. 하레는 할마시지. 준영은 열여섯 살 하레에게 십 년만 더 같이 살자고 속삭이며 매일 동네를 거닐었다. 그래서 산책 중인 준영과 하레를 만나면 나는 나의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우리 복이도 저렇게 키워야지. 몇 년 뒤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건강하게 산책하는 강아지로 키워야지. 느리지만 당당한 걸음의 하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준영은 멋쩍게 웃으며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준영이 나를 그렇게 걱정해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만나면 반가운 친구지만 둘이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준영이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레를 만나기도 전의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 어린 준영은 나와 비슷한 사고를 경험했고, 사고로 소중한 친구와 이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준영은 내가 통과하는 슬픔이 어떤 슬픔인지 잘 안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눈물을 닦으며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준영 씨, 나는 이제 강아지랑 못 살 것 같아요. 복이를 잊어버릴까 봐 너무 무서워요. 준영은 하레를 슥 바라보았다. 그리고 “절대”라고 말했다.

  "절대 잊을 수 없어요. 우리 이티, 여전히 내 아기고 이티와 보낸 시간 모두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하레가 아닌 강아지와 산책하는 준영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레가 아닌 강아지를 사랑하는 준영은 더더욱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정하게 하레를 바라보던 준영이 그때 이티는 자신의 전부였다고 했다. 지금도 마음속에 살아있다고.


  어린 준영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시는 어떤 개와도 살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낯설고 귀여운 강아지를 데려왔다고. 안 보려 했지만 막상 옆에 있으면 예쁘니까 또 그렇게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이티를 잊게 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건 노력으로 이룬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나는 준영이 보여주는 이티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준영은 우리 이티, 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으로 지금 하레를 더 건강하게 돌볼 수 있다고 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준영의 말을 곱씹었다. 돌아와서도 씻지 않고 누운 채로 계속 계속 곱씹었다. 그건 정말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나는 모로 누워 핸드폰 사진첩을 열었다. 취기에 한쪽 눈이 찡그려져 화면이 부옇게 번졌다. 내친김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SNS 어플까지 켜서 오래전 사진까지 다운받았다. 화질이 깨진 사진 속에서 어린 복이가 내 교복을 물고 다녔다. 털이 풍성한 복이가 벽지를 물어뜯고 물건을 망가뜨렸다. 감당 안 될 정도로 활발한 복이가 집안을 날아다녔고, 수많은 계절과 거리를 활보했다. 그렇게 최근의 사진까지 거슬러왔다. 대부분 기운 없이 잠만 자는 복이였다. 그건 보기만 해도 애틋해지는 모습이었다. 자는 복이에게 코를 박고 깊은숨을 들이쉬곤 했으니까. 조금만 더, 가능하면 오래오래, 하곤 했으니까. 서서히 날이 밝았다. 햇빛을 피하기 위해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복이와는 십 대에 만나 삼십 대에 헤어졌으니 사진을 보다가 날이 밝은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복이 폴더에서 가장 최근의 파일은 마지막 산책 때 찍은 짧은 영상이었다. 곧 있을 일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해맑았다. “복아”하고 부르니 달려오는 순진무구한 얼굴. 그 표정이 너무 맑아서 핸드폰을 꺼버렸다.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장면들. 눈을 감아도 생생한 장면들. 감으면 더 생생 해지는 장면들. 그건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었다. 준영의 위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해 주었다. 준영이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슬픔도 있겠지. 그 슬픔마저도 잊을 수 없겠지. 잊히지 않는데도 잊지 않으려 많은 날을 애썼겠지.


  잊을 수 없는 존재와 시간을 공유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지만 영원히 위로되지 않는 슬픔이기도 했다. 복이 인형에 코를 박은 채로, 하레에게 코를 박고 있는 준영을 상상했다. 하레야, 이렇게 십 년만 더 나랑 살자, 하고. 하레의 모든 시간에 준영이 촘촘히 기억되길 바랐다. 날이 빠르게 밝기 시작했다. 이상하리 마치 조용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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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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