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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애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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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희비극 Jul 24. 2023

#23

  개와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와 복이 사이에도 우리만 아는 놀이가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발소리 맞추기’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복이가 신발장에 미리 나와 있으면 복이가 이긴 거고, 미처 나와 있지 못했으면 내가 이긴 거였다. 복이를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살금살금 걸어도 계단을 다 오르기 전에 문 앞에서 짖곤 했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아슬아슬하게 내가 이겼다. 복이가 뭘 먹고 있었거나 똥을 싸고 있었거나 깊이 자는 중이었을 때. 그때마다 허둥지둥 나오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매번 발소리를 잔뜩 죽이고 다가가 재빨리 현관문을 열곤 했다. 집 앞 편의점에 다녀오는 잠깐 사이에도.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노력하지 않고도 내가 이기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일부러 느리게 걷기도 하고 쿵쿵 걷기도 했지만, 귀가 부쩍 어두워진 복이는 내 발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어느 날엔 내가 침대에 다가갈 때까지 모르기도 했다. 자고 있던 복이에게 누나 왔어, 하면 복이는 탁해진 눈을 끔뻑이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털고 침대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자기가 이긴 것처럼.


  지난밤 꿈에서는 오랜만에 복이가 먼저 나와있었다. 복이는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뱅글뱅글 돌기도 하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미용한 지 한 달 정도 지나 털이 적당히 자란, 할머니가 ‘기름칠을 한 것 마냥 예쁘다’고 했던 모습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복이의 얼굴을 충분히 쓰다듬고 한 손으로 복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복이의 기다란 다리 하나가 앞으로 삐쭉 튀어나왔다. 우리는 서로에게 편안히 기댄 채로 집안을 걸어 다녔다. 어째서인지 집에는 다른 동물들도 함께 있었다. 커다랗고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이었지만 다정하게 느껴졌다. 나는 복이를 안은 채로 그 애들도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방에 들어온 우리는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하얀 방에서 복이는 침대로 총총 뛰어올랐다. 땅을 파듯 매트리스를 긁기도 하고, 홑이불을 걷어내 숨기도 했다. 장난꾸러기. 나는 까르르 웃으며 이불을 들쳤다. 복아, 우리 복이 어디 있지? 여기 있나? 복아… 복아 … 그렇게 복이를 부르면 복이는 다시 나타났다가 숨기를 반복했다. 이불이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처럼 펄럭였다. 


  눈을 떴을 땐 아직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하얀 천장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끔뻑끔뻑 천장을 바라보면서 얼마간 꿈꾼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지난밤. 아기 꿈을 꿨구나. 복이 꿈을 꾸었어.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왔었네. 친구들에게 누나를 자랑하러 온 걸까, 친구를 사귀었다고 누나에게 자랑하러 온 걸까. 뜨거워진 눈을 누운 채로 꾹꾹 눌렀다. 


  거실로 나와 몇 년째 방치해 둔 요가 매트를 깔았다. 냉장고 문에 신년 계획표를 붙여 놓은 지 넉 달만이었다. 아침 스트레칭을 하겠다고 적어놓은 종이는 군데군데가 젖었다가 말라 울룩불룩했다. 요가매트에 앉아 이십 분짜리 전신 스트레칭 영상을 틀었다. 보기엔 만만했는데, 막상 해보니 모든 동작이 어설펐다. 불가능한 동작도 있었다. 그런데도 땀이 났다. 마지막 동작을 마치고 누운 채로 심호흡을 했다. 숨이 커다랗게 들어왔다 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번 더 숨을 고르고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났다. 소매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으며 신발장을 바라보았다. 물을 한잔 더 마시자 알람이 울렸다. 누레진 계획표 첫 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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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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