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백석 평전
작가 안도현과 김연수, 이미 누군가들의 호감의 대상인 이 두 작가가 모두 백석을 동경하고 흠모하여 그의 일생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 앞에 다정하게 내어놓았다.
하나는 평전으로, 하나는 소설로
나는 두 가지의 같지만 서로 다른 책을 / 따로 또 같이 읽으며 백석과 알고 지내고 싶어졌다.
백석 평전
- 지은이: 안도현
- 출판사: 다산북스
- 평전: 특정 인물의 업적과 활동을 부각해 교훈을 전달하고, 인물의 삶과 주변 인물, 시대적 상황 등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내용 <지식 백과>
일찍이 윤동주가 지은이보다 먼저 백석을 동경하여 그의 시집 사슴을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p.136) 그리고 백석은 오산학교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여 문학에 눈을 뜨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p.32) 백석과 동시대를 살아간 예술가 최정희, 노천명, 모윤숙 등 은 백석=‘사슴 씨’로 칭하며 고고하고 콧대 높은 백석을 교환일기의 말밥으로 삼기도 했고, 모더니스트 김기림은 “백석의 시는 향토적인 분위기가 있으나 복고주의가 아니라 모더니티의 치열하고 철저한 비타협(서구 문예사조의 형식을 그대로 베낀 게 아니라 우리의 정통성에 맞게 새롭게 구현했다는 의미)으로, 문단에 던지는 포탄”이라 극찬했다.(p.97)
이런 그림은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2. 우디 앨런)에서 주인공이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여 살롱에 앉아 있었더니 맞은편에 헤밍웨이가 있고 피카소가 있었던 그림 같이 느껴진다. 지은이는 독자들이 당시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끔, 경성의 광화문과 서촌에서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백석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시공간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복원하려 애쓰고 있다.
문학과 언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청년 백석이 유학을 통해 영문학과 서구 문예사조를 배운 뒤, 귀국하여 가장 민속적이고 민족성을 띤 단어(라기보다 방언)로 일궈 낸 시들을 발표한 것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어린 유년시절에는 자신의 고향 정주를 무대로 대가족제도의 풍습, 어머니의 음식과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치기도 했었다.
당시의 가장 현대적인 것을 배운 유학파가 더욱 우리 다운 것에 집중했다는 점에 있어, 말쑥한 모던보이를 바라보던 나의 시점도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 앞에 숙연해진다.
p.99 백석은, 식민지로 오염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고향, 시원의 순결성을 가지고 있는 고향과 그 방언에 착안했다. 이는 향토주의에 매몰된 결과물이 아니라 준비된 창작방법론이며, 의도된 기획에서 나온 것이다.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평단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백석의 삶을 지은이는 “잔혹했다.”라고 표현한다. 먼저 청혼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첫사랑 박경련과 자신의 절친한 지기가 결혼하는 깊은 실연을 겪는다.
p.156 이때 상심한 마음을 백석은 꽤 오래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 같다. 훗날 발표한 시에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따스한 봄밤인데도 밖에 나가지 않고 하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핏줄을 보는 자아가 등장한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연정을 품은 여인 자야를 만나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백석이 연인을 책임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p.170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장가를 들었다.(중략) 백석은 토라질 대로 토라진 자야를 위로하면서 만주로 가서 살자고 제안했다. 자야가 없는 쓸쓸하고 허전한 함흥에서 백석은 겨울을 보냈다.
p.174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구절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 동료 시인들의 침묵 또는 변절이 이어져 그 압박의 공기가 백석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다. 백석은 그럼에도 편집자로서 교사로서, 번역가로서 책임감 있는 역할을 수행해내고, 틈틈이 발표한 작품을 통해 가냘픈 시대를 지키고 있었다.
해방된 평양에서 분단이 시작되고, 문인들도 좌와 우로 재편되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때도 백석은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시대라서 가족 곁에, 고향인 북에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p.303) 다만 그것은 백석의 순수 예술, 서정시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랜 침묵 끝에 1956년 <아동문학> 제1호에 동화시를 발표하며 백석이 아동문학으로 순수성과 관심사를 확대했다고 볼 만한 일이 있었다.
p.342 유아들이 읽을 동시이므로 길이가 짧아야 하고, 지나치게 사상성이나 계급의식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p.355 사상성과 정치성이 부족한 작품이라고 집중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을 의식해서였을까.
그러나 백석은 시대정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노동자들과 호흡하며 새사람으로 거듭나라”는 임무를 받고 마치 유배와도 같은 <현지 파견>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은이는 평전을 통해 백석의 삶과 그 속에서 뜨겁게, 또는 처연히 떠오른 예술성을 그림 그리듯 한 권의 책으로 펼쳐 놓았다. 전면에 배치된 시들 덕분에 이미지가 자연히 떠올라 그림을 그리듯 책을 읽어 내려간다. 백석이라는 인물과 그 작품을 연구한 많은 자료를 인용하였고, 당시 근현대사 기록자료와 동시대 많은 인물들의 작품 및 그들의 전언을 통해 최대한 왜곡하지 않고, 백석을 훼손하지 않으려 애쓰며 복원하였다. 굵직한 그의 작품을 배치하고, 그 배경이 된 백석의 경험과 시절 인연, 역사적 사건과 그것들을 마주하는 그의 신념을 작품이 가진 시대적 가치와 함께 서술하였다. 이 도서를 예술가로서 높고 외롭게 살다 간 백석에게 헌정하는 듯하다.
일곱 해의 마지막
지은이: 김연수
출판사: 문학동네
소설: 백석의 1957년부터 일곱 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시간을 ‘백기행’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복원해 낸 글 <한겨레>
백석 평전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흔히 절필하고 번역가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추정하는 시기인 백석의 7년(1957~1963)을 소설가의 역량으로 상상해 낸 작품입니다. 소설이지만 당시 지명과 인물들의 본명 또는 호를 그대로 사용 <기행, 벨라, 준, 현, 상허 등>하고 있어 생활감이 느껴지고, 평전을 먼저 읽고 읽으면 그 인물들이 책 속에서 다시 한 편의 영화를 찍듯 펼쳐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작가 김연수의 도서를 단 한 번도 단숨에 읽은 적이 없습니다. 해석하고 그려보다 무슨 의미인지 다시 되돌아가는 게 더 많던, 제겐 쉽게 읽히지 않던 작가가 오랜만에 신작을 냈는데 ‘백석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한 땀 한 땀이 백석을 얼마나 공들여 상상해냈을지 궁금했고, 역시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벨라 <여류시인 벨라 아흐마둘리나에서 모티프>의 이야기가 제국주의, 전쟁과 이념이라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잔불조차 꺼지려 하는 백석의 남아있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좋은 발화장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p.32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p.83 술이 늘었다. 따져보니 인생은 전반적으로 실패였다. 원했던 삶이 있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
p.117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p.189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두 도서 모두 백석을 향한 진심 어린 위로와 동경을 담고 있고, 도서의 형식은 다르지만 결말은 모두 현재 진행형으로 백석이라는 시인이자 예술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백석과 알고 지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