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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하리 Aug 30. 2019

제3일 ④ : 홀팍의 ‘생활’ - 장보기, 식사, 오수

아내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고 슈퍼마켓에 다녀왔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우산을 쓴 건 자기뿐이었단다.

하루에 사계절이 모두 있다고 말하는 기후에 살다 보니 여기 사람들은 오락가락하는 이런 비가 자연스러운 모양이라고 했다.

뛰듯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슈퍼마켓에 도착했는데 어제 오레와보다 식품이 신선했단다.

무항생제 닭가슴살과 적색 양파, 내일 먹을 빵, 자외선 차단제(sunblock cream)를 사고 서둘러 돌아왔지만 그래도 50분이 걸렸다. 걸어서 갈만한 거리는 아니었던 듯싶다.

7시의 공용 부엌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벌써 저녁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요리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아 (가스레인지가 아닌!) 전기 레인지의 빈 곳을 찾아야 할 정도였다.

또 바뀐 부엌 환경 때문에 고생하면서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저녁을 먹었다.

싱거운 카레와 압력이 덜된 밥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모두 맛있게 먹었다.

아내와 난 어제 개봉한 김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또 손을 대버렸지만 이렇게 즐겁게 먹을 수 있다는 데 감사했다.

공용 부엌에 가서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아내가 씻는 사이 홀리데이파크를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 자리 옆 칸에 조그마한 구멍 위에 ‘Sink/Grey Water Waste Only’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회색 물(Grey Water)’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Sink’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니 생활오수를 버리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어제와 오늘 차에서 물을 계속 쓰기만 하고 버리지는 않았던 터라 괜찮은지 내심 걱정을 하고 있던 탓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생활오수를 버리기로 했다.

차를 받고 처음으로 생활오수를 버리는 일을 해 보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해 봄으로써 캠퍼밴에 익숙해지고, 캠퍼밴 생활에도 더 익숙해지리라.


뉴질랜드 홀리데이파크는 거의 대부분 사이트마다 오수 버리는 곳이 있다.


운전석 쪽 맨 뒤 아랫부분에 ‘waste’라고 씌어 있고 물을 뺄 수 있는 관이 있었다.

그리고 차 옆면에 가스통이 있는 부분의 문에 ‘Waste hose’라고 씌어 있었다.

그곳을 열었더니 호스가 놓여 있어야 할 칸에 호스가 없다.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창고를 열었더니 검은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 가방을 열어보았더니 호스가 하나 들어 있었다.

호스의 색이며 두께가 2008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급수용 호스는 아니었다.

창고를 마저 열어보니 또 하나의 호스가 있었고 모양이며 두께 등이 호주에서 봤던 급수용과 같았다.

조수석 쪽 창고 문만 열어보다가 운전석 쪽 창고 문을 열어보니 그동안 왜 없을까 궁금했던 것들이 나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 청소용 솔 등이 모두 그 창고 안에 있었다.

역시 안내문에 있다고 되어 있던 것들은 어디엔가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배수용 호스를 배수구에 연결하고 물을 버리는 곳에 대 봤더니 호스가 짧았다.

내일 아침에도 오수를 버리고 할 것을 생각하면 아예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 가서 옆자리가 비었으면 옮기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외출을 한 것이라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차를 옮겨서 생활오수를 버리고 다시 우리 자리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차가 완전하게 익숙지 않은 데다 옆자리를 빌린 사람들이 오기 전에 빨리 해야 한다는 마음에 차 옆으로 나오는 차양(Awning)을 쳐 놓은 채 차를 움직여 버렸다.

차를 움직이니 차양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그 바람에 우리 차 앞의 길 건너편에 텐트를 치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다.

7m가 넘는 차로 다른 텐트나 차를 잘 피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직 쉽지 않았다.

무사히 차를 옆자리로 옮기고 호스를 연결하여 생활오수를 버렸다.

80리터의 생활용수 탱크에도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갔지만, 같은 용량의 생활오수 탱크에서도 많은 물의 양이 오랫동안 쏟아져 나왔다.

이 작은 경험 하나가 무척이나 기뻤는데, 캠퍼밴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가 캠퍼밴 여행을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자신감도 주었기 때문이었다.

생활오수를 비우고 다시 우리 자리로 차를 옮기는데 앞 텐트의 여자가 불안한 듯 나와서 또 우리 차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사히 차를 다시 세우고, 차양을 다시 내리고 자리를 잡았다.


오수를 버리고 다시 자리를 잡은 우리 캠퍼밴.(오른편 Ma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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