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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추 Feb 05. 2021

뭐 할 줄 아는 게 있나

엄마, 왜 아이돌보미야? 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가정 조사서에 부모님 학력을 쓰는 란이 있었다.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각종 서류를 쓰는 일은 내가 도맡아 했다. 대부분 내 수준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가끔 모르는 것이 나오면 엄마에게 물어가며 작성했다. 엄마는 내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줬다. 나는 엄마가 해주는 말을 놓칠세라 바로 옆에서 종이에 또박또박 받아쓰곤 했다. 가정 조사서를 쓰다가는 학력이라는 단어에서 막혔다. 엄마에게 학력이 뭐냐고 물었다. 엄마는 평소와는 달리 바로 말을 해주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빠는 고졸, 엄마는 중졸로 쓰라고 했다. 나는 그냥 그런 줄 알았다. 엄마의 망설임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몰랐다.  


사실 우리 엄마는 초졸이다. (아빠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60년대생이다. 그러니까 여자로 태어났어도 적어도 중학교에는 가던 시절이었다. 엄마 또래 중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엄마네 집은 가난했고 엄마 뒤로 남동생 두 명이 더 있었다. 엄마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생계에 뛰어들었다. 일하면서 번 돈은 꼬박꼬박 집에 가져다주었다. 본인을 위해서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 덕분에 남동생들은 대학까지 나올 수 있었다.  


“외삼촌들은 엄마한테 평생 빚진 거나 마찬가지네. 엄마한테 고맙다고는 한적 있어?”

“아니. 그런 말 안 했지. 그때는 뭐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으니까.”

“엄마도 하고 싶은 일 있었을 거 아니야. 원래는 뭘 하고 싶었어?”


물론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선생님이나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초등학교까지만 나온 엄마에게 그 직업들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엄마는 좀 더 현실적인 일을 찾았다. 미용실에 취직해서 미용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할머니가 말렸다.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팔자가 사나워서 못 써. 그저 여자는 직장 다니며 월급 받다가 결혼하는 게 최고야.” 엄마는 이렇다 할 기술을 배우지도 못한 채, 바로 취직이 가능한 공장들을 전전했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젊은 여성들을 선호하는 공장들이었다. 세 번째 공장에 다니다가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했다고 해서 일을 쉴 수는 없었다. 보일러 가게를 한다던 아빠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는 계속 일을 했다.

엄마는 이제 살림과 육아까지 해야 하므로 직장을 다닐 수는 없었다. 개인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엄마가 선택한 것은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장사였다. 엄마는 동네에 오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장마차를 했다. 떡볶이도 팔고, 핫도그, 호떡, 도넛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팔았다. 그렇게 바닷가 근처로 나오는 포장마차가 많아지자 관리공단에서 단속을 나왔다. 엄마는 큰 죄라도 저지른 것 마냥 당장 그만두었다. 아예 번듯한 식당을 차리기로 했다. 아빠가 직접 조립식으로 식당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막상 식당을 하려고 하니 손이 부족했다. 동네에 하나 있던 문구점이 문을 닫는 걸 보고, 엄마는 좀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문구점을 시작했다. 간판에는 식당이라고 쓰여있지만 들어가 보면 문구류가 가득한 가게였다. 문구점은 잘 되는 듯했으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문구류를 다 사주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수입이 줄었다. 엄마는 미뤄두었던 식당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셋째가 생기면서 식당을 접었다. 문구점은 유지를 하면서, 농사일을 많이 했다. 가끔은 친척 아주머니가 일하는 회센터에 나가서 돈을 벌기도 했다. 요즘 말로 n 잡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엄마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돈 버는 일을 멈췄다. 큰 도시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잠시 쉬는가 싶었지만, 엄마는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몸이 좀 회복되는가 싶기 무섭게 농촌기술센터에 다니면서 요리를 배웠다. 지어둔 식당 건물을 어떻게든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학교에 다니는 것 마냥 신이 나서 센터를 들락날락했다. 한식조리사와 출장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요리와 관련된 수업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들었다. 병원에 가는 날이 줄어들자, 식당을 해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는 어려웠다. 자본금이 없으니 직원을 두기도 힘들었다. 엄마는 식당을 포기했다. 기술센터에서 딴 자격증을 가지고 병원과 어린이 집 조리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다시 몸이 아팠다. 조리사 일을 그만두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미래를 준비하며 배웠던 기술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어마는 어느새 중년으로 접어들었다. 엄마에겐 주부로서 살아오며 터득한 집안 살림과 육아 밖에 남지 않았다. 엄마는 중년의 여성들이 값싸게 활용되는 돌봄 노동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가사도우미를 했다. 매일 하던 일이니 어렵진 않았지만, 뭔가 제대로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집에서 평소에 하던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돌보미 사업을 알게 됐다. 정부에서 한다고 진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나에게 아이돌보미를 하는 이유를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엄마에게 아이돌보미는 운명적인 직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뭐 배운 게 있어야지. 할 줄 아는 게 있나.”


어렸을 적 내가 학력을 물어봤던 그때의 엄마 표정과 비슷했다. 나는 엄마의 망설임 속에서 그가 지나온 삶을 가늠해본다. 뜨거운 것이 명치께에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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