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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추 Jul 26. 2020

단단함과 답답함 사이

도리스 레싱, <금색공책>

매우 침울한 상태로 지냈다. 재닛의 엄마라는 내 인격의 단면에 아주 많이 의지했다. 줄곧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 안의 나는 지루하고 초조하며 죽어 있는데 난 여전히 재닛을 위해 평정을 유지하고 책임을 다하며 살아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 도리스 레싱, <금색공책2> 중에서


  아빠와 함께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엄마는 눈가가 빨개져있었다. 엄마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내 눈길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집안 분위기에 나와 동생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책을 펼쳤다. 방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지 그냥 놔두어야 할지, 한참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엄마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쌀통에서 쌀을 꺼내어 싱크대 앞에 선 엄마에게 나는 차마 왜 울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침묵 속에서 엄마의 눈물 섞인 저녁밥을 먹었다.


  그 날, 엄마가 왜 울었는지 한참 뒤에야 알았다. 한 달 동안 서울 막내 고모집에 다녀온다던 엄마는 사실 병원에 수술하러 간 거였다. 엄마는 유방암이었다. 다행히 심해지기 전에 발견했지만, 한쪽 가슴을 완전히 잘라내야 하는 수술을 받고 입원을 했다. 그러니까 그 날은 엄마가 암 선고를 받은 날이었던 거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 앞에서 실컷 울지도 못하고 방에 갇혀 흐느껴 울어야 했다. 다 내팽개치고 싶었을 그 날에도 엄마는 자식들 밥을 차려주기 위해 일어났다. 




  인간은 누구나 다중적이다. '나' 속에 수많은 인격이 살고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른 인격을 꺼내어 가며 살아간다. '엄마'는 한 인간의 단면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격에 비해 힘이 세다. 다른 나는 버틸 수 없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엄마로서의 나'는 살아남는다. 엄마로 살게 하는 힘. 그건 무엇일까. 사랑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에는 엄마라는 단어는 너무 크다. 사랑은 엄마를 표현하기에 너무 작은 단어다.  


  <금색공책>의 주인공 애나는 딸이 기숙사 학교로 들어가자, 다른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닮은 사람을 만나 깊은 우울감에 허우적대며 지낸다. 애나는 딸이 방학을 맞이해 잠시 집으로 온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서야 그와 헤어질 수 있었다. 그제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많은 엄마들이 그렇다. 그냥 '나'는 아무렇게나 지내도 괜찮지만, '엄마로서의 나'는 단단하게 서 있어야 한다. 내가 이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이 단단함이 답답함이 되기도 한다. 애나는 제닛을 낳은 뒤로는 시간 안에 갇혀 산다고 고백한다. 

재닛이 떠나면서 들었던 생각이 또 있다. 아무런 압박감도 없을 때 시간은 어떤 다른 모습을 띠는가 하는 점이다. 재닛이 태어난 이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난 편안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다. 아이가 있다는 건 시계를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함을, 어떤 순간에 앞서 완수해야 할 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재닛이 태어났을 때 죽어야만 했던 그 애나가 지금 다시 태어나고 있다.

- 도리스 레싱, <금색공책2> 중에서


  엄마의 시계는 늘 자식의 시계가 같이 따라다닌다. 우리 엄마가 암 선고를 받고 슬픔에 빠진 상황에서도 자식들 저녁을 굶게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 연민에 빠져 실컷 울고 싶었을 텐데, 엄마는 소리를 낮추어야 했다.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와 동생들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는 본연의 나로 돌아가 자기를 실컷 위로해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엄마의 삶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단단함과 답답함 사이에서 끊임없이 중심을 잡아가는 일은 엄마에게 주어진 정명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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