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의 대화
가장 어린아이가 곧 1학년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밥도 알아서 잘 먹는다. 언니들은 대화하는데 방해된다며, 아이들을 따로 한 곳에 모아 앉게 했다. 우리는 그 옆 테이블에서 앉아서 서로의 근황을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언니들은 20대 때 만났던 그대로였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면 지나온 시간들을 체감한다. 10분 이상 앉아서 이야기 나누기 힘들었는데 어느새 다 커서 저렇게 혼자 밥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됐을까. 물론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을 갖기는 힘들었다.
돈가스를 먹던 준영이가 순이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엄마, 나 이거 돈가스 너무 커." "괜찮아. 그냥 먹어." 언니는 그렇게 툭 내뱉고는 다시 우리 이야기에 집중한다. 준영이도 다시 밥을 먹는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말한다. "엄마 이거 큰데." "잘 베어서 먹어." 언니는 또 무심히 말한다. 준영이도 계속 밥을 먹는다. 준영에게 입으로 베어 물라며 끝까지 도와주지 않던 순이 언니는 어떻게든 입으로 조금씩 베어 먹으려는 준영이를 보다가 말했다. "그래 준영이 엄마는 이렇지" 옆에서 듣고 있던 선진 언니가 말했다. "애들이 엄마한테 적응해야지 뭐."
'아, 애들도 엄마들에게 맞추는구나!' 나는 그 사실이 새롭게 들렸다가 왜 귀에 꽂혔는지 의아했다. 아이와 엄마, 서로 독립적인 인격이 만났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난 왜 그걸 간과해버렸을까. 엄마들은 그냥 원래부터 뭐든지 품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나 역시 사회에서 쏟아내는 모성애 담론에 사로잡힌 거다. 그런 식의 모성애는 엄마와 아이 둘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맞아, 준영이 엄마는 이렇고 율이 엄마는 이렇고."
선진 언니의 말에 순이 언니가 덧붙인다. 그러고 보니 언니들이 말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본인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큰일이 아니면 자잘한 일은 개의치 않던 순이 언니는 준영이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편이다. 꼼꼼한 선진 언니는 너무 의지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도 율이를 옆에서 세심히 챙긴다. 언니들이 아이를 낳고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전보다 맡은 역할이 늘어났을 뿐이다. 언니들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엄마라는 단어로 언니들을 틀에 가둬버린 게 아닌가.
엄마의 모습은 정말 다양하다. 모성애라는 단어 하나로 치환해버리기엔 스펙트럼이 크다. 엄마들은 모두 한 명의 개인에서 출발했다. 준영이 엄마, 율이 엄마 엄마로서의 모습 안에 순이 언니와 선진 언니가 그대로 들어있다. 언니들은 여전히 유쾌하고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연대하고 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언니들 뒷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곳에 내 미래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