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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추 Dec 15. 2020

애들이 엄마한테 적응해야지

언니들의 대화

  "코로나 끝나면 만나자"

  코로나19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인식이 생겼을 때 즈음일 거다. 처음엔 건강히 지내라는 염원이 담겼던 이 말은 "언제 한 번 밥 먹자"처럼 만남에 무게를 두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인사말이 되었다. 진짜 곁에 두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런 기약 없는 말 대신 "코로나 거리두기 단계가 좀 나아지면 보자"라는 좀 더 현실 가능한 말을 건네게 되었다. 코로나는 나를 둘러싼 관계를 점검해보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코로나 끝나면", 누군가에게는 "좀 나아지면"이라는 말로 대화를 끝맺었다. 20대를 함께 보낸 선진 언니와 순이 언니는 후자에 속한다. 


  대학생 때 자원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언니들은 내 롤모델이었다. 언니들은 상대를 편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었고, 솔직하면서도 다정해서 힘들 때면 언제든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함에 당당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언니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니들 나이가 되면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언니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이 드는 것이 기대되기도 했다. 기껏 4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그 4년이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가 언니들 나이에 다다르면 언니들은 또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언니들  뒷모습을 따라가며 내 지금의 모습을 다져나가는 것이 좋았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사회생활에 치여있었고 언니들은 육아로 바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남이 뜸해졌다. 아주 가끔 언니들을 만날 때면 아이들이 함께 였다. 첫째 아이들까지는 괜찮았는데, 둘째들이 태어나고 아이가 4명이 되자 여기저기서 울고 떼쓰고 엄마를 찾는 바람에 대화가 끊기기 일쑤였다. 언니들과 만나는 것이 전처럼 편하지만은 않았다. 언니들의 모습에 나를 겹쳐보는 상상도 그만두게 되었다. 육아를 하는 언니들에서는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거리두기가 잠시 1단계로 내려갔을 때, 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언니들에게 연락을 했다.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공백기가 있었다. 하지만 언니들은 어제 통화한 듯 여전히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선진 언니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데, 역시나 나는 언니가 불러주는 내 이름이 참 좋다. 순이 언니는 만화에서 '으헤헤 헤'라고 표현되는 딱 그 웃음으로 웃는데, 듣자마자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좁혀지는 듯했다. 언제나 그랬다는 듯 우리는 기꺼이 만날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도 아이들이 함께 였다.


  가장 어린아이가 곧 1학년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밥도 알아서 잘 먹는다. 언니들은 대화하는데 방해된다며, 아이들을 따로 한 곳에 모아 앉게 했다. 우리는 그 옆 테이블에서 앉아서 서로의 근황을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언니들은 20대 때 만났던 그대로였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면 지나온 시간들을 체감한다. 10분 이상 앉아서 이야기 나누기 힘들었는데 어느새 다 커서 저렇게 혼자 밥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됐을까. 물론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을 갖기는 힘들었다. 


  돈가스를 먹던 준영이가 순이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엄마, 나 이거 돈가스 너무 커." "괜찮아. 그냥 먹어." 언니는 그렇게 툭 내뱉고는 다시 우리 이야기에 집중한다. 준영이도 다시 밥을 먹는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말한다. "엄마 이거 큰데." "잘 베어서 먹어." 언니는 또 무심히 말한다. 준영이도 계속 밥을 먹는다. 준영에게 입으로 베어 물라며 끝까지 도와주지 않던 순이 언니는 어떻게든 입으로 조금씩 베어 먹으려는 준영이를 보다가 말했다. "그래 준영이 엄마는 이렇지" 옆에서 듣고 있던 선진 언니가 말했다. "애들이 엄마한테 적응해야지 뭐." 


  '아, 애들도 엄마들에게 맞추는구나!' 나는 그 사실이 새롭게 들렸다가 왜 귀에 꽂혔는지 의아했다. 아이와 엄마, 서로 독립적인 인격이 만났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난 왜 그걸 간과해버렸을까. 엄마들은 그냥 원래부터 뭐든지 품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나 역시 사회에서 쏟아내는 모성애 담론에 사로잡힌 거다. 그런 식의 모성애는 엄마와 아이 둘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맞아, 준영이 엄마는 이렇고 율이 엄마는 이렇고." 


  선진 언니의 말에 순이 언니가 덧붙인다. 그러고 보니 언니들이 말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본인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큰일이 아니면 자잘한 일은 개의치 않던 순이 언니는 준영이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편이다. 꼼꼼한 선진 언니는 너무 의지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도 율이를 옆에서 세심히 챙긴다. 언니들이 아이를 낳고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전보다 맡은 역할이 늘어났을 뿐이다. 언니들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엄마라는 단어로 언니들을 틀에 가둬버린 게 아닌가. 


  엄마의 모습은 정말 다양하다. 모성애라는 단어 하나로 치환해버리기엔 스펙트럼이 크다. 엄마들은 모두 한 명의 개인에서 출발했다. 준영이 엄마, 율이 엄마 엄마로서의 모습 안에 순이 언니와 선진 언니가 그대로 들어있다. 언니들은 여전히 유쾌하고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연대하고 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언니들 뒷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곳에 내 미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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