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와 페루의 국경을 등지고
톰 행크스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본국에서 갑작스레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에 입국할 수도,
다시 출국할 수도 없는 상황.
영화 '터미널'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살아가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는다.
올해 초 비슷한 경험을 했다.
에콰도르 쿠엔카에서
페루 와라즈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한인 민박에서 만나 동행하던
누나들 2명과 야간버스를 탔다.
입국심사를 위해 잠시 내렸고,
몽롱한 기운 속에서 심사대 앞에 섰다.
직원이 내 여권을 유심히 보더니,
다른 직원과 속닥거린다.
별일이겠어 하며 넘기려니,
" 너 페루에 갈 수 없어. "
라고 말한다.
" 뭐? 페루에 못 간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
내 여권 유효기간이 6개월 미만이란다.
콜롬비아에서 에콰도르로 육로 입국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여기서 뭐라고 하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심장이 뛰었다.
몇 번이나 다시 물어봤고,
버스 회사 관계자까지 나서서
다른 방법이 없냐고 간곡히 부탁했으나,
나에게 돌아온 말은
" 에콰도르를 나갈 수도 없고,
페루에 갈 수도 없다. "
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버스를 탄 사람들 중 나만이,
유일하게 출국 도장을 받지 못했다.
새벽 12시가 넘은 시간,
외딴 한국인 여행자 한 명은
페루의 국경에 버려졌다.
핸드폰 유심도 없었고,
모든 체크카드는 콜롬비아에서 도난당했으며,
여권 유효기간은 만료되었다.
일주일 안에 리마에서 한국으로 가는
출국 편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데,
여권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 여권을 새로 만들면 한국으로부터
배송을 받아야 해서 최소 2주 정도 소요된다 )
나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새벽 12시에 외딴 나라에서 내가 도움을 청할 곳은
24시간 외교부 콜센터뿐이었다.
통화가 연결되어 직원분께 상황 설명을 하니,
수도인 키토에 있는 에콰도르 대사관에 가서
단수여권을 발급받으라고 했다.
여권을 새로 발급받는 상황은 피했고,
이틀이 걸려 다시 키토로 돌아갔다.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곧바로
임시여권, 단수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계여행을 다니며
이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을까?
모두가 나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
놓였을 것이라 상상되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누군가는
바로 국가라는 존재였다.
나는 결국 한국 사람이란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