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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01. 2023

또다른 엔딩

<나와 나와 나>(2019)


해피 또다른 엔딩

Happy Another Ending

 

<나와 나와 나(Ich Ich Ich)>(2019, 초라 룩스)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젊은 남자와 여자를 주인공으로 두는 로맨스 픽션은 청혼과 승낙으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이제는 구시대 유물이 된 법칙이나, 의외로 트렌디한 변주와 함께 종종 쓰인다. <나와 나와 나>에서 청혼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리는 연인 율리안의 남동생의 선상 결혼식에 참석한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밖엔 안보이는 듯하던 두 사람. 축사를 하던 율리안은 돌연 마리에게 프로포즈한다. 관중은 환호하고, 마리가 기쁨에 겨워 울먹이며 ‘예스’라고 답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리의 표정이 심상찮다. 그가 조용히 율리안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누군가 큰 소리로 옮긴다, “마리는 잘 모르겠대요!”. 분위기는 가라앉고 율리안은 자리를 뜬다. 카메라는 속상한 남자가 아니라 남겨진 여자를 조명한다. 군중을 등지고, 그 시선을 모두 감내하는.


연인의 관계는 이대로 끝난 걸까. 그리 간단하진 않다. 두 사람은 어른답게 이미지 사진 부스에서 대화를 나눈다. 마리는 ‘생각을 정리하겠다’며 엄마가 소유한 산아래 외딴 집으로 향한다. 그가 옷장에서 스웨터를 꺼내 입는 순간부터, 영화는 내면에 울리는 ‘생각타래’들을 인간의 형태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의 엄마, 젊은 날의 엄마, 전 애인, 그전 애인, 안나 이모… 이 ‘인간’들은 마리와 율리안의 미래와 진심,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온갖 생각들을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 물론 늘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어서, 과거 만났던 남자들에게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생각들은 좀처럼 그 주인이 원하는 대로 ‘정리’되어 주지 않는다. 살아 날뛰며 여러 갈래로 나뉘거나 전혀 연관성 없는 길로 빠지곤 한다.


마리는 시끄럽게 풀을 깎거나 장작을 패고 믹서기를 돌려보지만, 소리들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므로 가려지지 않는다. 정작 스스로 원하는 것을 듣고 싶어할 때는, 내면의 소리 스스로가 믹서기를 돌려버린다. 그들은 집요하게 마리의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거나, 자기들끼리 논쟁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마리가 기댈 품을 내어준다.


영화는 전개를 서두르지 않고 ‘주요 사건의 진행에 필요치 않은’ 순간들에 머무르곤 했다. 결혼식 날 화장실 앞에서 긴긴 줄을 기다리던 마리의 귀에 들어온 스몰 토크를 들려주거나, 낡은 집에 도착한 마리가 오래된 끈끈이 테이프를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리의 ‘생각 정리’를 대하는 태도도 이와 닮았다. 카메라는 (율리안이 실수했듯) 시간 제한이 있는데다 이분된 답을 요구하는 대신, 마리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며 기다린다.


율리안이 도착하고, 그의 소리들 역시 이곳에 살게 된다. 동생, 형, 아빠, 엄마, 나탈리아-의 대상화된 이미지. 바람직하게도 그에겐 “생각 경찰”이 있어서, “대상화되고 성애화된 이미지이므로 확산을 방지해야 한다”며 ‘나탈리아’를 몰아내기도 한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율리안과 마리는 각자의 성적 환상으로 인해 몸이 달아오르지만, 마리에겐 ‘생각 경찰’이 없으므로 ‘헨릭’은 잡혀가지 않는다. 하나 더, ‘헨릭’은 그저 이미지일 뿐인 ‘나탈리아’와는 다르다. 차단하는 대신 나름의 역할을 부여한 결과, 결혼제도를 싫어했다는 전 애인의 얼굴을 한 이 ‘생각타래’는, 마리가 스스로를 들여다보거나(늘 건강한 방향은 아니지만) 원하는 것을 찾도록 돕는 목소리가 되었다.


연인의 육체와 가까이 있게 되며, 목소리들은 섹스에 대해서도 말을 얹는다. 피임약과 콘돔, 욕구과 역할극. 작품은 강약을 조절하고 코미디 톤을 유지하며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재치있는 연출로 아우른다. “원하는 나의 이미지를 상대에게 쏴드립니다”라고 광고하는 마케터, “FACEBOOKPAUSE”라는 이름의 인터미션까지 등장하는 영화. 이쯤 되니 역시 온라인 미디어에 탐닉하는 관객을 의식했던 <배드 럭 뱅잉>이 잠깐 겹치기도 한다. 키스와 목조르기-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연결을 통해 생각타래들을 차례로 잠들게 하는 연출도 별거다.


관객은 이제 마리와 율리안 모두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는 율리안의 말도 틀리지 않으나, ‘별 생각 없는 행동’이라는 마리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대와 분위기에 휩쓸려 저지른 청혼-의 대가로, 두 사람은 각자의 압박을 받는다. 늘 이것저것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나를 괴롭혔던” 마리의 물음에 답하고 다투기도 하며, 율리안 또한 결혼과 미래, 진심과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헨릭’을 따라간 산속의 공터에서, 마리와 율리안은 거대한 건축물을 발견한다. 마리는 ‘이게 나야’라고 말하고, 율리안은 이해하지 못한다. 내려오는 길에 마리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내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고, 마리의 ‘느낌’을 다 이해하지 못한 율리안은 ‘소비에트적이야, 브루탈리즘이야- 검색해보자’ 따위의 잡다한 생각에 빠진다. 영화는 이 간극을 좁힐 수 없음을 말하며 로맨스를 비관하는 걸까. 그러나 산을 내려온 연인은 사우나에서 각자의 목소리들과 함께 땀을 빼며, ‘사랑의 시도’를 결정한다. “싫은 점까지 사랑해야 한다”- 너무 당연하게 들리는 마리의 대사, 율리안은 미소로 화답한다.


이후 의인화된 생각타래들은 서로에게 공유된다. 묻고 답하기, 웃고 떠들기, 술과 파티. “이제 어쩌지?” / “사라지게 해야지. / ”어떻게?” 마주보는 두 사람 주위에서 생각타래들은 뒤엉켜 싸우고, 아수라장이 된다. 허나 마리와 율리안은 흔들리지 않은 채, 눈을 맞추고 미소를 유지할 뿐이다. 카메라가 서서히 그들의 얼굴로 줌인하는 가운데, 아수라장은 서서히 느긋한 댄스 플로어로 변한다.


마리는 ‘예스’라는 답을 내리지 않았고, 율리안은 청혼을 사과했으나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서로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두 사람의 다음 걸음, 그것이 영화의 엔딩이다. 결혼으로 귀결되는 과거 가부장적 로맨티시즘의 환상을 깨며 시작한 <나와 나와 나>는, 시대에 맞게 발전된 건강한 로맨스의 이상향을 젊은 연인의 손에 건네주는 제스처로 이야기를 끝낸다. 관계와 자아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철학적인 고민을, ‘사고의 의인화’라는 초현실적 연출법을 통해 유머러스하고 영리하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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