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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09. 2023

바다를 담으려면

<어파이어>(2023)



<어파이어(Roter Himmel)>(2023, 크리스티안 페촐트)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나디아 파트는 파울라 비어 글에서 옮김



“In my mind, in my mind” (Wallners)

사운드트랙에 어울리는 몽환적으로 아름다운 햇살과 함께, 관객을 누군가의 꿈으로 이끌듯 영화는 시작된다. 곧 화면은 건조해지고, 차가 멈춘다. 고립의 예감. 레온의 상상이나 꿈으로 잠입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적어도 미세한 위화감이 들어선다. 위화감의 까닭은 작품 후반부에 밝혀진다. 낭독하는 헬무트가 재등장하기 전까지, 아마도 <어파이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레온의 소설 안이다. 헬무트를 연기한 배우는 <트랜짓>(2018)의 내레이터, 의도된 기시감이었다. <트랜짓>의 배경인 마르세유는 바이델의 마지막 소설에 묘사된 지옥도와 닮아 있었고, 로맨스를 찾은 게오르그에게 기약 없는 경유지는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 반대로- <어파이어>의 배경인 별장, 쉼터가 되어야 할 그곳은 레온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개인적 지옥’처럼 보이는 듯 했다.


여의치 않은 교통과 점점 가까워지는 산불, 풀리지 않는 글, 조용히 홀로되고 싶었으나 자꾸 손목을 잡아끄는 활동적인 외향인들 사이에 갇힌 내향인의 입장이라면, 과연 끔찍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레온의 상태는 단지 그의 성향 때문은 아닐 테다. 첫 작품으로 호평을 받은 그가 “형편없는” 소포모어를 배출할 위기에 처한 것은, 이야기를 끌어와야 할 세상에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이곳은 어쩌면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슬럼프에 빠진 작가의 내면 지옥일까.


그러나 외면과 자발적 고립은 답이 아니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 즉 레온의 소설은, 타오르는 영혼을 지닌 펠릭스, 데비트, 나디아가 꺼져가는 레온의 영혼을 자극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허나 사실 여기서 ‘영혼’(이 ‘영혼’은 입체성에 가깝다)이 있는 인간은 레온 하나다. 이 제한된 세계는 레온이 일컫는 ‘일’의 진척을 거스르는, 즉 그가 현상태를 탈출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주위 인물들은 질문을 던지고, 그가 컴퓨터 화면이나 종이가 아닌 ‘바다’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나디아의 등장으로 시작된 레온의 변화는 펠릭스와 데비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레온


차가 고장나기에 앞서, 펠릭스는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고 레온은 운전 면허가 없음에도 별 일 아니리라 넘겼다. 짜증 내는 레온, 문제를 해결하는 와중 친구의 기분까지 살피는 펠릭스. 주변을 감각하는 펠릭스와 벽을 세운 레온, 영화는 초반부터 이 ‘극’에서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을 암시했다. 레온은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고, 후자가 전자를 방해하는 상황을 참기 힘들어한다. 원고 쓰기나 포트폴리오 제작은 ‘중요한 일’, 요리나 빨래, 설거지, 지붕 수리 등의 집안일, 수영과 산책, 사적인 대화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차기작에 대한 조바심이 그의 무의식에 숨어 있던 편견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레온이 세상에 흥미를 잃은 데에는 그의 탓도 있는 것이다. 슬럼프를 깨고 지옥을 벗어나려면, 좁은 시야를 인지해야 한다.


레온은 나디아의 기분이 상한 까닭을 ‘청소하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해서’라 짐작한다. 인명구조원인 데비트를 끈질기게 ‘안전요원’이라 칭하며 깎아내리고, ‘우베 욘존’을 ‘우베 존슨’이라고 발음한 호텔 직원을 뒤에서 비웃는다. 이 편협하고 때로 악의적이기까지 한 언행은 자신에게로 수렴한다. 하나: 데비트에게 심술을 부렸던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이는 자신인데, 그가 (펠릭스를 유혹하기 위해) 지어낸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어서(, 그리고 그가 나디아의 애인이라고 착각해서)였다. 호텔 직원을 비웃었던 것은 불안을 농담으로 넘기려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둘: 시선의 주인은 레온이므로 타인의 반응이 그에게 닿지 않았다면 이어지는 장면들은 없었을 것이다. 호텔 직원이 받은 상처, 데비트의 불쾌와 펠릭스의 화가 레온에게로 전해졌고, 그- ‘반응에 대한 반응’이 화면에 담긴다.


식사 준비를 돕지 않고 제 일만 하던 레온은, 출판사 사장 헬무트가 도착하자 마실거리를 세심하게 준비해 대접한다. 농담이나 미소, 포옹은 그에게 있어 목적을 위한 상호작용, ‘중요한 일’을 위한 ‘중요치 않은 일’이다. 헬무트가 자신보다 펠릭스나 나디아의 작업에 더 관심을 보이자 제 자리, 우선순위, ‘중요성’을 빼앗길까 초조해한다. 그 자신이 나디아에게 감정을 느끼고 있음에도, 그는 순수한 호의나 관심을 믿지 않는 사람 같아 보인다. ‘원래 그런’ 이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무언가에 '중독'되었을 테고, 책을 쓰기 위해서라도 그에겐 일종의 디톡스가 필요하다.




나디아


레온에게 나디아가 포착되는 과정은 단계적이다. 첫 번째는 빨랫감과 라자냐, 널린 속옷 따위의 흔적, 두 번째는 옆방의 신음소리. 마침내 그를 목격했을 때도 시선은 일방적이다. 처음엔 집 안에 있는 레온이 밖에 있는 나디아를, 다음에는 집 밖에 있는 레온이 안에 있는 나디아를 관찰한다. 그러나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레온을 동요케 하고, 더 나아가 그를 마주 응시한다. 늘 붉은 원피스를 입은 채 화사하게 웃는 나디아, 그는 예쁘게 웃는 것이 제 일인 양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올리다가, 웃음기를 거두고 레온을 꿰뚫듯 바라보곤 한다. 주인공 남성을 필연적으로 매혹하고, 이어 깨달음으로 이끄는 ‘매닉 픽시 드림 걸manic pixie dream girl’. 소설 밖 레온이 그에게 부여한 역할이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나디아와 문학 박사 논문을 쓰는 나디아, 지붕을 고치는 펠릭스와 사진을 찍는 펠릭스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헬무트가 나쁜 소식을 숨기고 있음을 아는 자. 나디아는 펠릭스처럼 기꺼이 환경이 내면을 침범하도록 허용하며, 주변의 기쁨과 슬픔에 빠르게 공감함으로써 레온과 대조를 이룬다.




펠릭스


펠릭스가 하루를 보내는 태도는 그의 예술과 닮았다. “왜 항상 일 얘기만 해? 지붕을 고치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수영도, 전부 일이야.” 펠릭스의 대사에 담긴 의미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보다 복합적이다. 그가 일컫는 ‘일’은 ‘노동’보다는 ‘행위’에 가깝게 들린다. 설거지를 하며 “먼저 적응 좀 하고”라 답했던 그는, 환경에 몸을 맡기고 주변을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작품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예술가다. 멀리서 지레짐작만 하던 레온과 달리 그는 데비트에게 다가가 직접 소통한다. 목적 없는 상호작용을 나누며 사랑에 빠지고, ‘훌륭한 포트폴리오’의 실마리를 찾는다.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포착한- 펠릭스의 작업물을 보고, 헬무트는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펠릭스는 스스로 금방 깨닫는다, ‘바다’, ‘넓고 아득한 바다’. ‘바다를 담으려는 예술가는, 바다를 바라보는 인간을 먼저 담아야 한다.’ 완성된 레온의 소설을 중심으로 하는 <어파이어>, 그 내핵에 있는 작품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펠릭스의 포트폴리오다.




 곳의 재난이라 여겼던 산불은 레온의 눈앞을 덮쳐오고, 이어 친구를 앗아간다. 마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레온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막이 내려지는 듯했으나- 극이 마무리되고 레온이 이곳을 벗어날  있었던 것은, 그가 ‘눈물을 흘리고 싶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슬픔을 표출하고자 했다기보단, ‘나디아와 함께 슬퍼하고 싶어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형상의 본질은 ‘비극적 죽음 아닐 수도 있음을 감지한 것일까? 서로 부둥켜안고 불을 온몸으로 맞이한 ‘하나 시신- 거기서 사랑을 보았고,  사랑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위를 돌아보았고, 마침내 바다를 포착했다.


경찰이 죽음을 전할 무렵부터 끼어들었던 내레이션이 헬무트의 낭독으로 밝혀지며, 영화는 소설 밖으로 빠져나온다. ‘화자’ 레온과 소설 밖 레온의 외형은 같다. 일어났던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레온은 ‘지명이나 이름을 다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꾸며낸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경계가 모호한 액자식 구성은 관객이 (영화 속) 실제와 허구를 동일시하게 만든다. 책에 펠릭스의 사진을 삽입하고자 하는 헬무트의 제스처는 그 경계를 더욱 흐린다. 그러나 영화는 나디아의 것으로 짐작되는 사진 속 실루엣의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나디아인가요?” / “그런가?” 그들도 관객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제까지의 장면들에 등장한 이는 아마도 레온이 소설 속 인물로 대상화한 나디아다. 그러나 현재 스크린에 떠오른 사진은, 실재했던 펠릭스가 찍은 것이다. 그 뒷모습이 정말 나디아의 것인지, 그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작가만 알고 있을 테다.


<트랜짓>은 누군가를 발견한 듯한 게오르그의 얼굴로 끝났다. 이번에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주인공이 마지막에 ‘본 것’을 관객에게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홀로 남은 레온은 ‘유일하게 앞모습이 없는 사진’으로 남을 뻔 했던 나디아를 만난다. 뒷모습, 이어 앞모습을. 첫 만남에서 나디아를 몰래 관찰했던 소설 속 레온, 이 레온은 나디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나디아는 마주보며 웃는다. 이 ‘명확한 해피엔딩’은 어딘가 이상하다. 지금 스크린에 떠오른 ‘나디아’는 정말 나디아인가, 아니면 레온의 상상인가. 어쩌면 나디아는 영화 안 작가인 레온을 응시하는 영화 밖 작가의 분신, 타인과 연결되기를 갈망함으로써 내면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스토리텔러에게 미소를 보내 주는 것일까.




+

영화는 어찌하여 굳이 ‘실재하는 나디아’의 미소를 던져주며 깨진 판타지의 씁쓸한 여운을 앗아갔나. 어떤 확실한 희망의 증거를 주고자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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