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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Feb 05. 2024

그들은 어찌하여 피리 소리에 홀렸는가

<클럽 제로>(2023)


 

<클럽 제로(Club Zero)>(2023, 예시카 하우스너)

 

* 작품의 장면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인용에는 의역/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으레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학습해 온 것들을 의심하기, 개인과 세상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클럽 제로>, ‘의식적 섭식’ 이론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까닭은, 그 출발점에 있는 비판적 사고가 전부 틀린 것은 아니어서다. 그러나 노박이 가르치는 재사회화 커리큘럼의 중심에는 ‘믿음’과 ‘느낌’이라는 모호하고 비논리적인 요소가 있다. 기성사회로부터 배운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는 강요가 위험하듯, ‘내 몸/마음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믿으라’는 가르침 또한 위험하다.(‘리틀 조의 행복 바이러스’가 실재했다면, 그것이 위험한 까닭과 통한다) 허나 위험의 ‘가능성’을 논할 수 있을 뿐, 영화 상으로는 ‘노박이 틀렸다’고 단정지을 근거가 없다. 부모는 영양실조를 걱정하지만, 학생들은 ‘기분이 나아졌다’, ‘집중이 더 잘 된다’고 말한다.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그것이 착각임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의식적 섭식’이 ‘실제로 몸에 미치는 영향’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얼굴빛의 변화 정도인데, 빈약한 증거이며, 연출에서 강조되지도 않는다.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은 인터뷰에서 단식 투쟁 등을 언급하며, “먹지 않겠다는 결정은 정치적 발언”이라고 설명한다. “그들(클럽 제로 맴버들)의 결정은 매우 급진적/극단적이지만, 식품 산업의 책임을 묻는 엘사의 말은 개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요약)고. ‘의식적 섭식’을 하자고 주장하는 영화는 당연히 아니다. 학생들이 노박의 말에 설득 당하는 과정, 각자의 말과 행동, 처한 환경에 대한 묘사에 집중해 영화를 받아들여야 할 테다. ‘그들은 어찌하여 거기까지 가버렸는가?’,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이다.  



정교하게 구성된 공간 안에서, <클럽 제로>의 카메라는 침착하게 관찰한다. 불확실성과 무력감에서 오는 불안이 앰비언트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정적인 스크린을 뒤덮는다. “전체적인 그림을 봐야 한다”는 노박의 가르침은 흥미롭게도 영화 자체에 적용된다. 카메라가 줌 아웃 하며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던 범위까지가 화면에 담길 때, 관객은 ‘이것을 보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감지하게 된다. 라그나의 부모가 테라스에서 ‘학부모회를 설득해 노박을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과 카메라 사이로 규칙적인 물줄기가 오간다. 화면은 서서히 줌 아웃되어 물줄기의 용도(정원에 자동으로 물을 주는 시스템)를, 그리고 커다란 주택 전체를 담는다. 엘사의 부모가 소파에 앉아 딸을 걱정하는 시퀀스가 끝나갈 무렵, 화면은 역시 서서히 줌 아웃되고, 한쪽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하우스키퍼가 포착된다. 그들의 계층, 그리고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거기 드러나 있었다.


많은 비용을 내고 자녀를 엘리트 기숙 학교에 보냈으니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싶어하는 부모- 노박을 추궁하던 교장은 학부모들을 대강 그렇게 묘사한다.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Z세대 끝자락의 십대들, ‘클럽’ 맴버들은 부모와 단절돼 있다. 그 자신이 닫아 걸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프레디의 부모는 프레디를 ‘골치 아픈 아이’라고 여기며, 친절하게 밀어낸다. 엘사의 부모는 각각 강압-방치의 태도를 보인다. 채식 요리를 내놓는 라그나의 부모는 언뜻 연결을 시도하는 듯한데, 결국 그들이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은 딸 자체보다는 도덕적 우월감일지도 모른다. 노박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을 제 언어 안으로 교묘하게 흡수시킨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노박의 언어로 말하게 된다.


의식적 섭식 참가하는 학생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먹는 행위를 질타하고,  적게 먹을 것을 권한다. 학부모 회의, 라그나의 아빠가 노박을 옹호하는 발언을 (형식적으로) 유도할 , 부모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부모 집단의 명분 ‘아이들을 위해서’, 학생 집단의 주장 ‘우리 자신을 위해서’,   자기 최면일 터이고, 전자는 위선이기도 하다. ‘프레드와 노박 사건 대해 논의하며, 부모들은 사실로 알려진 정황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 무엇이 있을지 강조했다. 그들의 방식은 대면이나 증명이 아닌 그럴듯한 가정, 노박의 논리와 크게 다를  없어 보인다.



감독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우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끌어올리고자 했다”고 말한다.(요약) 물질적/도덕적 허영을 가꾸는 그대들은 자녀들에게 충분히 물을 주고 있는가, 영화는 그것을 묻는 것일까.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던 엘사, 라그나, 프레드는 가이드를 원했다. 사회 경제적으로 ‘결핍되었다’고 여겨졌던 벤은 (처음에는) 노박의 논리에 관심이 없었다. 정서적으로 충만했고, “one of us”(프레드)가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노박은 교장과의 대화에서 벤의 ‘결핍’을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원인’으로 짚는데, 아마도 스스로의 말을 믿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또한 ‘결핍’의 특징을 지녔으므로. 노박이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니라는 점은 후에 ‘학생들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의 원인으로 화자된다.


영화 내내 노박은 이성적으로 보였고, 대개는 확신에 가득  보였다. 스스로 설파하는 바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행동하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는 방에 신단을 차려 놓고 기도하며, “어머니 가르침을 갈망한다. 어렵지 않게 ‘mother nature’ 연상된다. 여전히 믿음의 정체는 모호하지만, 그럴듯한 설(!)을 세워 보게 된다. 노박은 어쩌면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이 아니고자 한다. 그가 퍼트리는 극단적 식이요법의 긍정적 효과는, 실천자가 아니라 지구 전체에 맞추어져 있다. 점점 인류가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해 가는 세상, 지구 당사자에게 가장 빠른 해결책을 묻는다면, 그는 인류를 쫓아낼지도 모른다. ‘클럽 제로, “Save the planet, kill yourself.”(크리스 코르다) 같은 식의 무시무시한 슬로건을 교묘하게 ‘인간의 몸에 좋은 으로 포장해 퍼트리는 임무였을 수도 있다. 노박에게 타겟이 있었다면 비교적 무고한 십대가 아닌 그들의 부모,  부모들의 부모,   부모들의 부모다.



엔딩,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우리도 먹지 않으면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홀로 남은 헬렌에게 방법을 묻는다. 사실 오프닝부터 영화는 ‘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의식적 섭식’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까닭을. “아무런 기회도 도망갈 곳도 없이, 세상의 끝에서 침을 뱉는”** 상황에 처한 이 십대들은, 앞선 세대의 유해한 “유산”(미아 바시코브스카)으로 인해 “녹아내리는”** 지구와 거기 던져진 자신들을 걱정했고, 몸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어른이 노박이 아닌 그들 각자 혹은 전부의 보호자였더라면, 프레드, 엘사, 라그나, 벤의 결말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클럽 제로>는 참으로 동시대적인 스릴러다. 감독의 말처럼- 관객은 영화를 관람하며 ‘그들은 먹지 않게 되었다’는 공포스러운 결과에 압도당하겠지만, 끝내는 ‘왜’를 묻게 될 것이다.


** : Yeah Yeah Yeahs (Feat. Perfume Genius), ‘Spitting Off the Edge Of the World





+

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장학금이었지만, 그게 그의 잘못은 아니다. 덧붙이면, '유해한 유산'을 영원히 외면할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장학금을 저당 잡힌 벤은 스스로 고민할 기회를 빼앗긴 채 노박에게 휘말렸고, 그의 엄마 역시 아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빼앗겼다. 벤의 케이스가 특히 안타까운 이유다.



* 참고 인터뷰

https://youtu.be/EU488wT2F9U?si=7yw80vjY6Azz85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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