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Mar 19. 2024

평범한, 별난, 혹은 모호한

-사랑,을 돌아보게 하는 최근의 연기들



* 언급하는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이 짧은 글은 ‘반려종 선언’(도나 해러웨이)의 어느 구절로 인해 구체화되었다.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 도나 해러웨이, ‘반려종 선언’ (2019 책세상, <해러웨이 선언문> 161페이지, 황희선 옮김)


거칠게 적으면: 해러웨이가 말하는 ‘사랑’은 통상적으로 일컫는 ‘일 대 일의 로맨틱 러브’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위 구절은 다른 종으로 분류된 두 존재 사이의 사랑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쓰였다. 그러나 나는 성격 검사지에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연결해 버린다’와 같은 문항이 나오면 ‘매우 그렇다’를 선택하는 자이니. 최근 관람한 영화를 곱씹다 해러웨이의 사유를 떠올렸고, 인간들의 로맨틱 러브를 다룬 영화 셋을 나열해 버렸다. 상황에 맞춰가며 관계를 유지해 온 부부, 특수한 계약으로 맺어진 연인, ‘운명적인 사랑’에 이끌려 삶의 방식을 정했던 과거를 돌아보는 이,가 각각 등장한다. 그들은 특별한 연기를 통해 생명을 얻었고, ‘대체 무엇이 사랑이고 그것은 어떻게 지속되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해러웨이 선생님 죄송합니다… 젠더와 종의 바이너리를 넘어서는 kin을 말씀하신 이 위대한 선언의 구절에 어쩌다 보니 헤테로 러브를 연결해 버렸네요. 그렇지만 이 뷰티풀한 문장에 크레딧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단 말입니다.)

 



<패스트 라이브즈>(2023, 셀린 송)

그레타 리 as 노라 & 존 마가로 as 아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메인 포스터에는 그레타 리와 유태오가 서로를 마주하는 스틸이 있다. 어린 시절 첫사랑에서 출발해 재회하고 엇갈리다 마침내 대면하는 나영과 해성의 러브 스토리일까. 두 배우의 애틋한 시선과 샤론 반 이튼의 보컬이 만나면 아마도 내 눈물샘이 열리리라 짐작하며 극장으로 향했다. 좀처럼 울리지 않던 마음은 예상치 못했던 순간 진동했다. 노라(나영)와 남편 아서가 침대에 누워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작가답게, ‘이야기 속 내 역할’을 객관적으로 자조하는 아서의 톤은 상당히… 무해하다. 그것을 유머러스하게 받는 노라의 마음 한구석에는 분명 해성이 있다, 그러나. 나영-해성의 사랑과 노라-아서의 사랑은 다른 모양을 이룬다. 아서는 ‘지루하다’고 묘사했지만, ‘노라의 그린 카드를 위해 결혼했다’는 이 부부 사이에는 여러 해에 걸쳐 쌓인 친밀함과 신뢰, 편안한 애정이 있다. 단편적인 모먼트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의 선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나영과 해성이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는 여러 장면보다, 노라와 아서가 횡단보도 너머로 서로를 발견하는 장면이 더 기억에 남았다.


몇 조연으로 감질맛나게 맛보았던 그레타 리의 꾸밈없는 재치와 섬세한 디테일이 다층적으로 담겨 있는 작품이었다. 존 마가로가 숨기려는 듯 아낌없이 드러내는 연약함은 <퍼스트 카우>에서와는 또 다른 색으로 빛났다. 소중한 배우들의 드문 조합이었다. (본인이 나오지 않는) 침대 대화 씬은 유태오의 페이버릿이기도 하다고.[인터뷰]


<패스트 라이브즈>(2023)



<피난처>(2022, 재커리 위곤)

마가렛 퀄리 as 리베카 & 크리스토퍼 애봇 as 핼

 

고급 호텔 방,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음식을 주문한다. 블론드 단발에 정장 차림의 여자가 들어와 서류를 꺼낸다. 대화가 이어지고 대본이 화면에 클로즈업되며, 기업 비즈니스로 엮여 있는 듯했던 그들이 ‘정말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허나 이제 겨우 시작이다. ‘파악했다’고 여겼던 상황은 뒤집히고, 다시 뒤집히기를 되풀이한다. 극히 한정된 공간, 롱테이크 위주의 숏, 등장인물은 단 둘, 소재는 도미나트릭스(dominatrix). <피난처(Sanctuary)>는 대사와 연기의 힘에 절묘한 카메라 무브를 보태 나아가는 이인극이다.

 

마가렛 퀄리와 크리스토퍼 애봇은 마치 극중 인물들처럼, 도미나트릭스 다이내믹을 중심에 두고 호흡을 맞추는 듯 했다. ‘플레이’와 ‘브레이킹 캐릭터’를 반복하는 와중, 긴장이 풀리거나 심리가 변화하는 순간들을 훌륭하게 잡아낸다. 호흡과 강약의 조절이 기가 막히다. 무엇이 ‘역할’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갈수록 구분키 어려워진다. 플레이가 성공적으로 작용하는 까닭 중 하나는, 연기임을 알고 몰입해서다. 그렇다 하여 그 속에 ‘진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그들만의 ‘안전한’ 공간에서 ‘지배하고 지배당할 자유’를 얻고, 그건 어떤 면에서 ‘진짜로 진짜’다. 마가렛 퀄리의 강렬한 제스처 사이 빈 얼굴에는 자각하는 진심이, 크리스토퍼 애봇의 ‘당하는’ 반응에는 저도 모르는 진심이 비친다. 결국 이야말로 “생츄어리”라고 설득해버리는 대담한 전개. 팝콘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다, 이내 입을 쩍 벌리고 팝콘따윈 잊게 만드는 연기. 도미나트릭스 플레이를 하며 여생을 보내기로 한 이… 숨막히게 로맨틱한 ‘연인’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더라도, 어쩐지 응원하게 된다.


<피난처>(2022)



<메이 디셈버>(2023, 토드 헤인즈)

찰스 멜튼 as 조


서른 여섯 살인 조는 24년 전 삶의 방향을 결정했던 사랑을 돌아본다. 그는 타블로이드 1면을 장식하며 ‘팻숍 보이’로 다뤄졌다. 이후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던 세계에 머무르며, 아내와 함께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써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확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인생을 살아갈 방식을 택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사실 되돌리고 싶은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 출발점에 있었던 사랑마저 의심스럽다.


<메이 디셈버>는 모호함을 통해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다면적인 인물들에게 현미경을 들이대기보다는, 지나가는 찰나를 클로즈업하여 섬세하게 포개 놓음으로써 끝내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엔딩, 촬영장에 흐르는 드라마틱한 전형성- 새미 버치와 토드 헤인즈, 찰스 멜튼이 쉐이핑한 조에겐 그것이 없었다.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이예요.”) 멜튼은 믿음직스러운 버팀목 같은 실루엣에 미스테리한 공허를 드리우더니, 점점 연약하게 흔들리다 무방비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졸업식 시퀀스, 세상으로 나아가는 제 아이들을 지켜보던 조의 얼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복잡한 심리를 설득하는 멜튼만의 표정, 거기엔 “메이”와 “디셈버”가 공존하고 있었다. 나탈리 포트만과 줄리안 무어도 물론 굉장했으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이 불편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복습하고 싶게 만든 이는, 찰스 멜튼이었다.


<메이 디셈버>(2023)



매거진의 이전글 2023 개인적 리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